가장 안전한 당신에게
3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이 나이에 애착인형이 생겼다. 다름 아닌, 이케아에서 산 작은 강아지 인형. 어린 시절부터 동생과 나는 인형놀이를 좋아했고, 우리는 늘 인형에게 우리의 목소리를 입혀 생명을 불어넣은 다음 각자 안고 있는 인형으로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특히나 우리는 사람의 형태보다는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 형태의 인형을 좋아했는데 그래서인지 어디든 인형을 파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가보는 편이다. 올봄, 동생과 함께 간 이케아에서 다 똑같이 생긴 강아지 인형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가운데, 동생이 고심하여 가장 귀여운 놈으로 골라줬고 나보다 더 인형놀이에 탁월한 재능이 있던 동생의 안목을 믿었기에 한 치의 고민 없이 녀석을 샀다. 이후에 다시 한번 이케아에 간 적이 있는데, 다시 찾은 인형 코너에서 쌍둥이 같이 생긴 강아지 인형들보다 정말로 우리 집에 있는 녀석이 가장 귀엽다는 것을 확인했다.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어릴 적, 강아지에게 쫓기고 물린 이후로 귀엽지만 동물을 가까이하지 못했고 사실 성인이 된 지금도 길에서 개나 고양이를 만날 때면 피하는 편이다. 아쉽지만 귀여운 동물은 영상으로 즐기는 걸로. 여전히 이빨이 있고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생명체가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두렵다. 그래서인지 무서움은 빼고 귀여움만 쏙 빼닮은 동물 인형은 물릴 걱정도 없고 마음껏 만질 수 있으니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좋아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젠 버젓한 이름까지 있는 녀석을 출근할 때마다 침대 위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잘 뉘어놓고, 집에 돌아오면 이름을 불러준다. 집 잘 보고 있었냐는 뜻으로. 이 나이에 이렇게나 유치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내 눈엔 너무너무 귀여우니까.
부서가 감사실이다 보니 중년의 아저씨들 사이에서 홀로 홍일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남들이 잘 모르는 고충 중의 하나는 그들의 끝없는 아재개그를 들어줘야 한다는 점이다. 매번 서로의 개그가 괜찮았느니 별로였느니 아웅다웅하는데, 제삼자인 내가 봤을 때 재미를 떠나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갖고 있는 그들의 공통점은 하고 싶은 개그는 꼭 입 밖으로 내뱉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을 꺼내면 재미없지 않을까, 한 번쯤은 생각할 법도 한데 꼭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웃기고 싶은 이야기)는 꼭 말을 해야만 하는 것 같다. 그 나이에도 희한하게 모두가 조금씩 웃기고픈 욕심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다들 바쁜 가운데에서도 틈틈이 유치하다.
며칠 전, 저녁을 먹은 뒤 선선한 밤공기에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금 멀리서 나를 앞서 가던 아저씨가 대뜸 나무 뒤로 숨는 것을 목격했다. 쫓거나 쫓길 것 같은 복장도 아닌 민소매와 반바지, 슬리퍼 차림의 아저씨가 갑자기 저런 행동을 취하는 게 흥미진진했다. 알고 보니 머지않은 곳에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아저씨는 멀리 아내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아내를 놀라게 하고픈 마음에 나무 뒤로 숨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저씨의 바람대로 다행히 아내 분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그의 마중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고 아저씨의 작전 성공을 위해 자연스러운 행인인 척 그의 옆을 지나갔다. 선선한 밤공기 속에서 마주한, 성숙할 것만 같은 어느 어른의 유치한 귀여움. 그것은 아이들이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절대 모자라지 않았고, 역시나 무해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며칠간 재택근무를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재택근무 기간 동안 나는 나의 소중한 애착인형을 틈틈이 안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어딜 가든 애착인형을 안고 다니듯이, 나 역시 할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녀석을 안고 털을 쓰다듬었다. 이 나이에 계속 이러는 거 비정상적인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던 차에 그날 밤 그 아저씨를 만나고서 알았다. 내가 가장 안전하다 생각하는 대상 앞에서 사람은 유치해지고 미성숙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한 달의 절반 이상을 출장으로 외지에서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안전한 곳에, 가장 귀여운 녀석이 가장 편안한 침대 위에 늘 자리해 있었다. 나의 미숙함을 드러내도 되는 곳에서 사람은 기저에 숨겨둔 유치한 모습을 내보인다. 각자의 출장지에서 전투를 마치고 돌아와 두꺼운 가면을 벗고 어떤 비밀과 고충을 말해도 되는 편안한 사람들과 만날 때, 너나 할 것 없이 그간 숨겨둔 아재개그를 던지는 것처럼.
그러니 누군가 당신을 만나 나이에 맞지 않게 유치하고 미성숙한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만큼 그에게 당신이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니, 노여워말고 그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1절만 하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매번 입술까지 차올라와 맴돌지만, 꾹 참고 아재들의 성실하기 그지없는 개그에 귀를 열어두고 미약하게나마 반응해 주려한다. 뭐 어떤가,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는데. 그만큼 내가 그들에게 안전한 사람이라는 의미일 테니.
항상 집을 나서기 전, 나의 애착인형을 지정된 장소에 두고 떠난다. 다만, 출근할 때는 볕이 잘 드는 곳에 앉혀두고 멀리 출장을 갈 때엔 기간이 긴 만큼 침대 위에 뉘어둔다. 오랫동안 계속 앉아있으면 허리 아프니까. 참, 내가 생각해도 감사실이라는 근무처에 걸맞지 않게 집에서는 이렇게 쓸데없이 유치하고, 미숙하기 그지없다.
이러나저러나, 또다시 떠나야만 하는 출장들이 연달아 계획돼 있다. 빨리 업무를 끝마치고 돌아와, 귀여운 녀석을 끌어안고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