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잘

저스트 아메리카노

by autumn dew

연이은 출장에 이어 드디어 맞이한 설 연휴였다. 명절 때가 되면 미혼으로 사는 것의 장점이 더욱 돋보인다. 시댁과 제사, 먼 귀성의 일은 당연히 남의 얘기다. 아직인지 영영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은 남의 얘기다. 게다가 요즘은 혼자서도 더 잘 사는 사람이 많으니, 언제 결혼할 거냐는 이야기도 예전만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충동적인 마음을 경계하고 선택에 신중을 기하라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고로 아직 명절은 나에게 자유로운 휴식이다. 직장동료로부터, 아직은 그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족들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연휴는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짧은 방학이 아닐 수 없다.


연휴를 맞아 즐거이 할 수 있게 된 일은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남들은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연휴 중엔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늦게 일어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도 없었기에 아무런 고민 없이 매일 커피를 마셨다. 카페선 스스럼없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 어떤 메뉴보다 깔끔한 맛인데 가격도 가장 저렴하다. 사실 이런 당연함을 한 달의 절반을 출장지에서 보내야만 하는 나의 업 때문에 오래 잊고 살았다. 수시로 바뀌는 잠자리에 커피라도 줄이면 조금이라도 더 숙면을 취할까 싶어 커피를 경계한 지 오래되었으니.


다행히 요즘에는 디카페인 커피를 취급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아무리 마셔봐도 디카페인 커피는 본래의 커피 맛에는 미치지 못했다. 비싼 만큼 더 맛있으면 좋으련만. 잠에 잘 들 수 있게 해 준다고 하기엔 그 옵션에 비해 맛이 아쉽다 보니 외려 커피값만 비싸게 느껴진다. 결국 커피의 고소함은 카페인에서 나오는 건가.



본가에서 보냈던 연휴의 매일 아침과 점심에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매일 커피를 마셔도 아무렇지 않게 잠에 들었고 아무런 알람 없이 잠에서 깼다. 물론 부모님의 이른 기상시간에 미치진 못했으나, 평소 출근 시간에 비하면 매일이 여유롭고 호사스러운 아침이었다. 카페에 가서 피를 주문할 때에도 평소와 달리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틀에 박힌 규칙들과 관계들을 덜어낸 자리에 주저함 없이 커피가 들어왔다. 꽤나 괜찮았던 교환.




아주 오래전에 여행을 다니며 찍은 커피와 관련된 사진들을 이곳에 모아 올려둔 적이 있다. 가끔 그 글을 다시 읽어보는데 그때는 디카페인 커피라는 게 있지도 않을 때였는데, 잠자리가 바뀌고 시차도 심한 곳에서 그토록 커피를 즐겼다는 사실이 놀랍다. 젊어서 그랬나. 아무쪼록 선 곳에서 마신 한 모금의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렇다고 카페를 안 간 것은 아니다. 단지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것뿐.



몇 년 전, 퇴근 후 일주일에 한 번 핸드드립 클래스를 들은 적이 있다. 원두에 대한 설명부터 물의 온도와 손목 스냅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조금만 달라져도 커피의 맛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바리스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흡사 대단한 요리의 세계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간의 나는 이렇게나 풍미가 있고 맛있는 요리를 맛보다 기능에 집중하여 취하였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지고.




연휴의 끝에 맞이한 짧은 이틀간의 근무. 다음 주에 다시금 또 출장을 떠나야 했기에 이틀 근무로는 모자라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이제는 체념한 듯 주말에 출근을 한다. 마트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컵밥을 하나 산 다음,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텀블러에 담았다. 가뜩이나 쳐지는 주말 출근에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


잠시나마 카페인에 익숙해진 틈을 타 지금의 기세를 이어가 보려 한다. 달의 시간으로도 해가 바뀌었고, 올해는 한 모금의 즐거움을 즐길 줄 알았던 나를 되찾고 싶다. 술은 아무리 마셔도 늘지 않았지만, 커피는 이 정도면 다시 늘릴 수 있겠지. 카페에 가서 메뉴를 그만 뚫어져라 보고 싶거든. 디카페인 옵션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지도 않고. 그저 가장 기본적이고 저렴한, 고민 없이, 단순하지만 만족스러웠던 그 한 모금의 맛을 바로 주문하고 싶다. 옵션이라면 계절에 따라 따뜻한지, 차가운지만 결정하면 되는.


이렇게 주절거린 글의 결론은 단순하다. 고민 없이 단순하고도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 연휴가 끝나 다시금 돌아온 관계의 세계, 역마의 삶이지만 카페에서만큼은 망설임 없이 커피를 주문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고요하고도 고소한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올해 제가 자주 하고 싶은 말은요.

전 아메리카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