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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Dec 18. 2022

스티커를 붙여주세요

어느 날에서 어떤 날로

고등학생 때, 학교 앞 문구점이 문을 닫는다며 남은 몇 주간 재고를 처분하는 파격 세일을 했던 적이 있다. 세일을 해서 좋았다기보다는 나는 학교 앞에 문구점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제 참고서는 어디서 사며, 간식들은 어디서 사 먹을 것이며, 적은 용돈으로 할 수 있는 소소한 쇼핑도 끝났구나 하고.

어려서부터 나는 문구점에서 보내는 시간을 엄청 좋아했다. (아마 어린이라면 다 그렇지 않았을까) 천원도 안 하는 간식거리들이 늘어져있는 바닥과 벽에 걸려있는 휘황찬란한 스티커들. 아- 그리고 가끔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을 때가 있었는데, 가기 전에 문구점에 가서 작은 선물을 사고 주인아주머니께 포장을 해달라고 하면 아주머니께서는 어쩜 그렇게 각이 딱딱 맞는지 깔끔하게 포장을 해주셨다. 선물을 사는 것보다 포장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이 더 행복했다. 별 것 아닌 선물이 엄청 그럴싸해지는 마법 같았달까. 게다가 그 시절의 문구점은 다 인심이 좋았던 건가. 포장 서비스, 추가 비용을 받지도 않았. (다이소나 아트박스 같은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나는 특히 문구점에서 스티커 사는 일을 좋아했는데 평균 500원 대의 소비로 소확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 스티커는 아껴 써야 하기 때문에 친구에게 줄 편지 봉투의 마감재(?)로 쓰거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오려내 어딘가 붙일 때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헤프게 쓰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아끼다 똥 된다는 말처럼 언제 사놨던 건지 모를, 오래되고 끈적해진 스티커들이 무더기로 발견돼서 버리기도 했고.

그렇게 좋아했던 스티커들을 어른이 되니 좀처럼  일이 없어졌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물건을 살 때 우선순위로 두는 것에 있어 심미성과 실용성의 순위가 달라지니.




내가 고3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하고 있는 유일한 습관다이어리를 쓰는 것이다. 흔히들 이렇게 말하면 엄청 거창한 일기를 쓴다고 오해하는데, 나는 그저 하루의 키워드만 기록할 뿐이다. 얇은 다이어리를 주로 선호하고, 주간 일정을 기록하는 페이지에 오늘의 키워드만 기록한다. 예를 들면,

옆 부서 친구들과 점심으로 짬뽕밥

오늘도 일의 홍수

퇴근하고 운동까지 마무리(feat. 달이 예쁨)

드라마 000(남자 주인공 이름) 왤케 설렘?

뭐 이런 식.
그러다 가끔 좀 길게 늘어뜨려 기록하고 싶은 날엔, 다이어리 뒤쪽에 만들어진 메모 페이지 란에 글을 좀 더 쓰기도 한다.


월초에 썼던 목표, 아직까지는 유효하다


12월이 되자, 올해의 다이어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또 실감이 됐다. 그렇게 다이어리가 몇 장이나 남았나 뒤적거리다 보니, 맨 뒤에 부록으로 들어있던 스티커 몇 장이 뒤늦게 발견. 꽤나 귀여웠고 종류도 다양.

이 스티커들로 무얼 할까 하다, 아끼다 똥 됐던 지난 경험을 빌어 그리고 특별히 쓸 일도 없으니 올해의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보고 나름 의미 있었던 날에 스티커를 붙여주기로 했다.


1월부터 12월까지 하루하루의 키워드를 읽어보니, 훌쩍 지나가버린 줄 알았던 올해를 나름 잘 채워온 듯했다. 그러다 특별히 키워드 옆에 하트나 별표가 더 붙어있었던 날, 다시 돌이켜보니 썩 나쁘지 않았던 날, 그런 날들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줬다. 앙증맞은 스티커가 붙으니 제법 요즘 말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의 준말이라고 했나)한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했다.

물론 매일 좋을 수만은 없으니, 한숨 섞인 짜증의 이야기들이 적혀있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슬픈 느낌의 스티커를 붙여줬다. 그 또한 올해의 나였으니까. 오히려 그런 날일수록 얻어낸 교훈은 더 많았으니, 굳이 모른 척 덮어둘 필요는 없었다.



쳇바퀴 굴러가는 삶이라 했거늘, 다시 보니 꽤나 성실히 살아냈더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나 겨울 느낌이 나는 스티커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스티커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구점 아주머니의 그럴싸한 포장처럼 스티커 하나로 잊혀질 뻔했던 날들이 그럴싸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마치 올해의 나에게 시상식을 해준 것 같은 느낌도. 이 날 엄청 고생하셨구요, 이 날 참 근면성실하셨요, 이 날은 힘들어도 보람됐겠어요-처럼. 스티커 하나하나에 의미가 부여됐다.


상을 남발하면 권위가 떨어진다는데 뭐 어떠냐 나만 알아주는 건데. 그중 색다른 행복으로 기록된 날이 브런치 작가가 된 날이었더라. 시청각실에서 직장교육을 듣다가 갑자기 울린 합격 알림에 쏟아진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던.




얼마 남지 않은 올해는 일에 치여서 보낼 것으로 전망됩니다만. 마지막까지 나를 위하는 일,  쓰는 일, 아끼는 사람과 만나 각자의 소회, 내년의 바람을 공유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을 이다.  2022년 다이어리를 잘 마무리 짓는 일도.



신에게는 아직 몇 개의 스티커가 남아있습니다.


지금 찍은 점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지 무슨 의미로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을 찍어 자국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오늘'이라는 점을 찍어나간다.

- 우지현, '나의 사적인 그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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