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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Nov 19. 2023

굳이 친절할 수 있도록

'착한 척'의 두려움에서 멀어지기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본 어느 위인의 격언.


"살아오며 말을 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지만, 말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이 문장이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뉘앙스는 동일다. 사회초년생 때쯤 알게 된 문장이었는데, 당시 깊게 공감했다 보니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기억하게 됐다.


사회초년생 때는 발언권이 크게 주어지지 않는 데다 질문할 일이 많지, 답변을 할 일은 크게 없다 보니 말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았다. 말할 일이 적으니, 후회할 일도 적었.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질문보다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고, 거기다 말 '잘' 해야만 했다. 게다가 답은 물론 조언도, 가끔은 상대가 듣기 싫어할 법한 쓴소리도 내뱉어야만 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는 쓴소리는, 말을 내뱉는 내 입에도 아주 쓴맛이었다.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말을 해서 후회할 일은 있어도 말을 안 해서 후회할 일은 없는데, 또 쓸데없이 말을 해서 이렇게 후회를 하게 되는구나.'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쓴소리를 중화시켜 말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해야 할 말을 하되, 최대한 후회하지 않으려고. 톡으로 말을 건네야 할 때는 미리 메모장에 쓰고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기도 했다. 웃긴 건, 이젠 또 반대로 이런 나 자신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끝내면 될 것을, 뭐 이리 고민하고 순화시키는 건지. 남들은 너처럼 안 살아요. 할 말 그냥 다 해요. 괜히 순화시켜서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말의 의미와 그 말이 전하는 감정을 모두 잡으려 하다 보니,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다시금 예전의 격언이 떠올랐다. 조언이고 뭐고, 후회할 바에야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중의 나에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한 때는 그래서 말을 아끼기로 결심했고, 그런 내용을 글로 쓰기도 했다. 말을 잘할 자신이 없어서 말을 아끼겠다고. 말을 잘할 수 있을 때까지, 말하기를 좀 쉬겠다고도.




매일 반복되는 별다른 이슈가 없는 일상 속에서 한 줄의 위안과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한 권을 끝내고 다른 책을 읽기보다는 여러 책을 병렬로(?)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주로 철학 책과 심리학 책을 즐기는 편이다. 최근 읽은 어느 심리학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친구로부터 듣게 된 짧은 일화를 소개해주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의 친구가 다닌다는 어느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 이야기였다. 저자의 친구는 이사를 간 뒤에도, 의사 선생님의 친절함 때문에 먼 길이지만 계속 그 병원을 찾는다. 그렇게  변함없는 친절한 태도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의사 선생님께 어느 날, 친구가 질문을 건넸다고 한다.


"선생님은 참 친절하세요. 어떻게 이렇게 친절하세요?" 친구의 질문에 의사 선생님이 대답한 말이 화룡점정이었다.


"내가 좋아져서요."

- 임영주, '이쁘게 관계 맺는 당신이 좋다' 中



가끔 겉보기엔 '선'이지만 속으 '위선' 의심하며 행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본심을 다 드러내고 살 순 없으니, 당장의 불편을 피하고자 얼굴에 철판을 깔고 행하게 되는 꾸며낸 친절. 배려라고 명하고 싶다가도, 그럴 때마다 자책하듯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가 있었다.

'너 또 착한 척하네.'


나는 그 목소리가 가끔 무서웠다.

진정한 의도를 나조차 알 수 없었기에. 이것이 절로 우러나온 배려인지, 착한 척하는 연기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배려로 위장한 위선에 마음이 기울 때마다 그 목소리가 주는 부채가 두려워 말을 아끼고, 말을 미뤄온 걸지도 모르겠다. 어떨 때는 상대에게 혹여 이 마음 티가 날까, 나아가 이로 인한 나의 지나친 에너지 소진을 막고자 친절을 베풀려던 마음을 미리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책의 일화 속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친절의 사유는 단순했다. 너무 짧고 명확한 데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지라 어이가 없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그 말은 내가 지향해야 할 친절의 방향성처럼 들렸다. '친절의 의도에 의심이 드는 순간, 결과적으로 이 일을 행한 내가 좋아질 것만 같은 친절이라면 그것은 위선이 아니겠구나.' 하는. 각 잡은 연기로 무장된 작정한 위선이었다면, 아마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좋아지기보다는 싫어지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당장엔 위선처럼 느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 되돌아봤을 때엔 잘 참아내고 잘 대처했다고 스스로를 대견스레 여긴 일들이 꽤나 많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좋아졌던' 일들.




위선의 자책감이 무거웠던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런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다른 이들이 나를 칭찬하는 일이 불편했다. '그런 좋은 말씀은 참 감사하지만 둘이 있을 때만 표현하시고, 어디 가서 얘기하지말아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좋아지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친절했던 일이라면 그건 위선이 아니라고.


'이 험한 세상, 왜 굳이 친절해야 하나요.', '왜 상대는 변하지 않는데, 나만 친절해야 하나요.'에 대한 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은 느낌. 친절의 의도에 대한 기준이 생겼으니까.


책 '헤르만헤세의 문장들'의 첫 페이지


그러나 책에서 얻은 답처럼 굳이 친절하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으면서도, 그래도 이왕이면 최대한 들키지 않고 친절하고 싶다. 톡을 보내기 전에 메모장에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는 일, 불한 이야기에 내색 없이 웃으며 응하는 일. 이렇듯 나만 아는 친절의 준비와 인내의 연기를 티 나지 않게 해내고 싶다. 그러니 어렵겠지만 마음으론 두 발 다가갔다가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나, 실제론 한 걸음 정도 가까워진 선에서 친절하려고 한다. 뒷걸음질 친 한 발 사이의 간격엔 '내가 좋으려고' 했다는 이유, 그 공간 '타적 이기심'에게 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굳이 친절했던 일에 무겁게 수반됐던 마음의 소리로부터, 그 불편함을 덜어내고 싶다.


이제 연구해야 할 일은 '착한 척'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친절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속담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의 의미서 나아가 '내가 좋아서 한 일을 남이 모르게 하라.'.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한 번 나아가 '내가 좋아지려고 한 일을 나 조차도 모르게 하라.'로. 어떻게 하면 자연스레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지를 경험으로 공부해 나갈 것이다.


일화 속 의사 선생님처럼 내 친절의 이유에 한 치의 의심 없이 이유를 답할 수 있기를. 마침내 어떠한 의심 없이  친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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