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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Dec 03. 2023

쫓기고 있던 것들로부터

연말의 소회

얼마 전, 크게 몸살감기를 앓은 탓에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나갔던 저녁운동(이라 하고 싶지만 운동인들의 눈엔 산책 수준)을 2주 정도 쉬게 되었다. 감기에서 회복된 이후 오랜만에 다시 집 앞 공원을 나섰는데, 그새 체력이 떨어진 건지 원래 다니던 코스만큼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 코스 한 시간 만에 다 걸었던 건지.


저녁 운동을 나간 지 이제 2년이 조금 넘었는데, 해가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다. 앞사람을 휙휙 제치며 걸어갔던 때와 달리, 최근엔 수시로 뒷사람에게 역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 감기까지 앓오랜만에 나간 저녁운동은, 늘 걷던 시간 동안 원래의 코스만큼 걸어내지를 못했다.


게다가 운동을 다녀온 후에 봐야 하는 드라마도 있었던지라(난 아날로그인이라, ott플랫폼 보다 본방사수를 좋아한다), '이 즈음에 집에 들어가야 씻고 드라마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코스 절로 단축것 같기도.


그러다 얼마 전, 퇴근 후 즐겨보던 드라마가 종영했다. 이제 이만하고, 이즈음에서 반환점을 돌아 집에 일찍 돌아가야 한다는 그럴싸한 핑곗거리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




먼 타지의 출장에서 돌아와, 퇴근 시간보다 다소 일찍 집에 돌아온 이번 주 중의 어느 날. 그날 장시간 운전을 해 다리가 뻐근했던 탓에 이른 저녁을 먹고 다리도 풀 겸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고, 이젠 봐야 할 드라마도 끝나 시간적 제약도 없었다. 그런 일련의 심적 여유 때문이었을까. 이틀간  두 시간이 넘는 곳에 출장을 다녀다소 피곤했 이 날, 하게도 예전의 걷던 코스 그대로 한 시간 안에 힘듦 없이 운동을 완수했다.


까지 돌아오는 길 남아있는 체력이 조금 의아했다. 나이 들어서 체력이 떨어졌다 생각했는데, 왜 오늘은 여유로웠던 걸까. 곰곰이 그 차이를 생각해 보니 하나는 조금 밝은 이른 시간 운동을 나선 것. 또 하나는 이 운동의 에 날 기다리고 있는 드라마가 없다는 것. 오로지 이 두 가지 이유뿐이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게 될수록, 자동적으로 체력의 나이도 그에 비례해 떨어졌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니까. 그러던 도중에 희한하게도 원래의 코스로 운동을 완수하고도 체력이 남았던 날. 지친 일과의 나열 끝에도 하루의 나이가 젊어진 것 같았던 그날. 나는 그 희한한 하루를 내 삶에 녹여내보고 싶었다.




우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서는 것. 여기서 말하는 이른 시간이란 새벽처럼 절대적인 일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이른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일 테다.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이른 시간이니, 무엇이든 지금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밝을 때에.


몇 월 며칠 몇 시에 시작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 가장 젊은 지금 이 시간에 길을 나서기로 결심하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걸로. 그러면 조금 더 수월하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개인적인 To-do 리스트들을 다시 확인하고 앞으로는 계획보다 조금 일찍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길의 끝에 날 기다리고 있거나 쫓아오고 있는 것이 없다 생각하는 것. 20대는 시간 젊음이 무한하다 생각하고 쫓김이 없이 살았다. 유독 '취업'이라는 미션에 쫓겼을 뿐, 다행히 그 문제를 해결하고  후에 나를 크게 압박했던 것은 없었다. 그러나 30대는 결혼, 출산, 재테크 등 '이때쯤엔 이 문제를 풀기 시작해야 해!'하고 사회에서 밀어붙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쫓긴다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과제처럼 느껴지는 그것들은 모두 내 상상 속 드라마에만 아직 머물러 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그 시점 그 시간에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없다.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고로 쫓길 이유가 없다.



"이번 주 금요일이면, 12월! 실화인가요?"

이 말을 이번 주에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2023년이라는 숫자가 아직도 어색한데, 벌써 2024년 탁상달력이 책꽂이에 대기 중이다. 다행히 생일이 연말의 끝이라, 아직도 만 나이로는 한국 나이에 비해 두 살이나 적은 나이이지만,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통념이 만 나이를 인정해주지 않으니 한국 나이로는 이제 완연한 30대 중반이다. 또 이렇게 한 살 더 먹어간다. 그런 생각으로 항상 연말이 서글펐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보다, '늙는다', '약해진다'는 생각이 최근 몇 년간 더 지배적이었기에.


물리적인 나이와 노화는 막을 수 없다. 대신 여유는 갖고 싶다. 그리하여 누군가 알려 준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조언들보다 몸소 느꼈던 그날의 지혜 내 삶에 적용 한다. '내년이 되면 해야지!' 계획했던 것들 중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 알아보고, 가능하면 조금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해야 할 일, 만나고 싶은 사람 조금 일찍 마주할 생각이다.


그리고 사회가 정해준 통념의 드라마에 쫓기지 않을 것이다. 나에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 먼저다. 드라마는 끝나도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뒤따라 오는 것은 없다. 지속되는 기나긴 레이스에서 '완벽한 구간 통과'보다, '완전하고 안전한 완주'를 꿈꾼다.



묵은 해니 새 해니 구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 학명선사



 초, 동생과 떠난 일일여행  청도 운문사에서  글귀. 연말에 다시 보니 새롭다.



네, 맞습니다.

지금 창밖을 보니, 하늘이 어제와 똑같네요.

2024년 하늘도 똑같겠지요.

저는 이렇게라도 일찍 꿈에서 깨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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