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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an 07. 2024

한 해의 처음인 것들과

반복적인 '새 마음'

언니처럼 따르는 직장선배가 몇 년 전 연말, 새해 덕담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뻔한 인사 대신 '내년에는 훨씬 더 재밌을 거야.'라는 단순하지만 예언 같은 인사를 건넨 적 있다. 새해 인사로 '재미'라는 단어를 선택한 그녀의 시선이 놀랍기도 하면서, 흔히들 말하는 '행복'이라는 평온하면서도 거창해 보이는 단어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감정의 그 말이 나는 퍽 듣기 좋았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부터, 연말인사를 타인에게 건네면서 '행복'보다는 '재미'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흐뭇한 미소로 인지하는 행복보다,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호탕한 웃음이 이듬해 그에게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받은 느낌처럼, 그에게도 구체적이고 확실한 예언이 되길 바랐다.


지난해 연말, 누군가를 응원하며 쓴 크리스마스 카드 연말인사에도 '재미'가 포함됐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재미있을 거예요. 나는 행복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재미'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더 좋더라고요. 내년에는 분명 올해에 얻은 걸 바탕으로 더 재미있을 겁니다.




새해 첫 출근이었다.

일찍 출근하는 것이 습관인지라, 그날도 내가 우리 건물의 가장 첫 출근자였고 복도의 불을 켜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지난주 연말 마무리 업무에 정신이 없었던 탓에 화분에 물을 주지 못하고 퇴근한 것을 깨달았다. 연휴까지 끼어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화분들을 화장실로 옮겨 물을 주기 시작했다. 조금 말라버린 아이들에게 물을 끼얹으며, 연신 "미안해. 미안해. 버텨줘서 고마워."를 내뱉었다. 올해의 첫 출근에 내뱉은 첫인사, 첫마디였다.


화분을 옮기고 2023년 달력을 정리했다. 벽걸이부터 탁상까지, 그리고 지난 월간지들과 기간이 지나버린 지침서들을 종이박스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작년에 미리 받아 둔 2024년 벽걸이 달력을 걸며 첫 페이지를 뜯었다. 올해 받은 달력은 유럽의 풍경 사진들로 꾸며진 달력이었는데, 1월에 인쇄된 사진은 핀란드의 헬싱키였다. 사진을 마주하며 혼자 "우와-"하고 소심한 감탄을 내뱉었다. 내가 좋아하는 낮은 채도의 도시. 무슨 색이든 다 품어 것 같았던 그곳. 그렇게, 무슨 색이든 품어줄 것만 같은 한 해의 시작. 그 처음에 마주한 사진이 헬싱키의 사진이라 좋았다.



새해 첫 출근일에 학교에선 시무식 행사를 한다. 전 교직원이 참석하는 시무식, 통상적인 국민의례와 신년사 낭독 등이 끝나면 우리 학교는 마지막에 꼭 '악수회' 느낌의 신년인사를 주고받는다. 일부의 사람들(주로 높으신 분)이 1열이 되고, 이 1열의 사람들과 악수를 주고받은 2열의 사람악수를 다 마치면 1열에 나란히 합류한다. 그렇게 계속 줄을 이어가다 2열이 사라지면, 1열의 시작이었던 사람이 다시 2열이 되면서, 나란히 서 있느라 악수를 하지 못했던 1열의 사람 악수 하며 인사는 끝이 난다.


예전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쉴 새 없이 내뱉어야 하니 발음이 꼬이기도 하고, 뒤로 갈수록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엔 사람들과 악수를 건네는 시간이 좋았고, 특히나 친애하는 분들이 한 손으로는 악수를 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내 손등을 감싸주셨는데 그 마음이 따듯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은 한 손은 악수를, 한 손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지난해에 고생 많았어요." 하는 인사를 덧붙였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이전에 근무하던 건물미화 여사님을 만났다. 여사님께 새해 인사를 건넸는데, 곧 정년을 앞둔 여사님은 살짝 울컥한 표정으로 새해인사와 함께 나를 안아주셨다.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아 "또 봬요!"하고, 급하게 인사를 건네며 사무실로 향했다. 숱한 목소리, 그리고 떨림으로 전달된 올해의 첫 응원들.


모두 올해의 처음이지만 어쩌면 반복적인 일, 그러나 새롭기도 했다.



1월 1일, 올해 들 가장 처음 읽은 책은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이었다. 평소 책을 읽고 인상 깊었던 문장은 노트에 따로 기록해 둔다. 한 권을 순식간에 읽고 바로 기록해 두었던 작가인터뷰 일화 중 하나.


인숙 씨를 찾아가자 그는 내가 매일같이 먹는 버섯과 오이가 어떻게 시작되어 자라고 식탁에 오르는지 알려주었다. 사고로 비닐하우스에 불이 나 모든 작물이 다 타버린 해에도 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도.

그는 '새 마음'이라는 표현을 썼다. 뭐든지 새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자꾸자꾸 새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중한 일을 오랜 세월 반복해 온 사람의 이야기였다.


'새 마음'이라니. 쳇바퀴 같은 n년차 직장생활, 매년 숫자만 담스럽게 늘리고 있는 나에게 이 글이 훅하고 와닿았다. 더군다나, 1월 1일에 이런 글을 읽게 되다니 우연을 가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품는다는 '새 마음'. 그렇게 올해의 첫 책과 첫 기록이, 여기에 또 다른 첫 기록으로 남았다.




아직 올해의 처음이 되고자 나를 기다리는 일들이 많다. 이 얼마나 재미 기대인가.

변변찮은 일상의 기록을 감사히 읽어주고 계신 당신에게도, 올 한 해 재미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재미'라 명명하는 순간 소중해지는 작은 변화, 리고 극히 사소하지만 설레는 처음이.

나를,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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