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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렉싱턴 Mar 04. 2016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임경선,<나의 남자>

이 소설을 읽은 이유는 순전히 저자 때문입니다. 제 브런치를 보니 소설에 대한 글이 하나도 없군요! 저는 아무래도 논픽션을 더 좋아하는가 봐요. 물론 이따금씩 읽습니다만, 제 브런치에서 소개한 적이 한 번도 없네요. 이것이 처음 쓰는 '소설에 대한 글'이 되겠습니다.

저자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사실 읽은 책은 한 권 뿐입니다. <태도에 관하여>지요. (이제 소설을 읽었으니 두 권째 읽은 셈이 됩니다만) 제 브런치에 <삶의 관점 1>이라는 글로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공감이 많이 됐던 책입니다. 상담 칼럼을 오랫동안 연재하셨다고 했는데, 그 책에서 무엇인가 새로 배웠다기보다는 제가 살다 보니 겪고 배우고 느꼈던 점들을 <태도에 관하여>에서 재확인한 느낌이었습니다. 저자에 호감을 느낀 부분은 몇 군데 더 있습니다.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해서라면 책을 쓸 정도이고요. 채널예스에 연재하는 칼럼은 다음 글을 기다릴 정도로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트위터도 팔로워가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솔직하면서 세심한 표현을 훌륭하게 쓰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활발히 활동하시는 분이라 좋습니다. 저는 역시 '다작'하시는 분이 좋습니다. 영화배우도 자주 나오는 배우가 호감이 가고요.

소설은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30대 중후반,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소설가 한지운에게 불현듯 찾아온 사랑의 감정. 만약 실화였다면 뒤에서 엄청 욕먹을 이야기였겠죠. 저도 아마 함께 수군거리는 사람들 중 한명이겠습니다만, 소설을 읽을 때는 그저 순수하게 주인공이 느낄 감정을 깊이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아이가 있는 부부의 생활이란 어떨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나진 않겠지요. 결혼이란 것은 누군가가 말했듯 또 다른 시작일 따름이자 부모를 떠나 잠시 혼자 살았던 것에서 '함께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활로 나아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듬뿍 담아서요.

하지만 그/그녀를 처음 만나 두근거렸던 감정은 점차로 잦아들고, 각자의 일에 파묻혀 매일매일의 생활이 버거운 사람들에게는 '사랑'은 점차로 희미해지는 모양입니다. 사랑만으로 시작하고 될 것 같았던 게 나중에 돌아보니 사랑이 들어앉을 자리는 온데간데 없고, 심지어 사치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나 봅니다. 삶이 버겁다 보니 서로에게 늘어진 모습만 보이게 되고, 배려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결정을 미루고, 싸우기 싫어 말을 아끼게 되고, 그러면 처음엔 사랑과 호의로 배려하고 말을 아꼈던 것들이 거대한 가면으로 바뀌어 가정에서도 표정을 숨기고 말투를 숨기게 되나 봅니다. 그런 생활이 몇 년이고 지속되다 보면 '나 자신'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저 남은 것은 십 년 동안 끓여낸 국물뿐인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빼놓고 사람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라는 종이 생겨난 이래로 사랑이 없었던 적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때까지 사랑이 한 순간이라도 없다고 느껴진다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남녀 간의 사랑이든, 다른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이 지속되는 것이 느껴져도 (현대인이 으레 그렇겠지만) 지운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오늘은 국이 뭐야?"라고 묻는 남편에게 분노가 치밀어도, 국이라는 한 글자 단어가 본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본인의 커리어마저 부정 당하는 것처럼 느껴도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인내심 있는 아내여야 합니다.(본문 p.153~155 인용) 또 다른 감정 노동과 사회 생활이 아닌가 싶네요. 참, 어렵습니다. 소설에서의 누가 사랑을 느낀 그녀를 공감할 수 있을까요. 친한 고등학교 때 친구라고 해도 마음 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한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sns로 온갖 괴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버리고, 신상이 털려버리는 세상입니다.

30대, 40대의 사랑은 잃을 것도, 얽힌 것도 많은 사람들이기에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습니다. 이성의 칼날도 가장 푸르게 날 선 시기입니다. 서로의 감정을 죽이고,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을 유지하면서, 그저 잠깐 잠깐 둘만의 공간에 있는 것, 그 와중에도 각자의 일에 몰두하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갑니다.

예전에 읽고 듣고 보았던 몇몇 사랑 이야기를 같이 떠올리면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노우에 아레노의 <채굴장으로>, 손예진과 감우성이 나왔던 <연애시대>, 같은 것들을요. 난치병만큼이나 힘든 '사회적 속박'이라는 조건에서 어른들이 서로의 감정을 쌓아 나가는 모습,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됩니다. 책이 발간되자마자 바로 사서 읽었지만, 스스로 너무 빨리 읽지는 않으려고 했습니다. 중간중간 글귀들을 되새겨 가며 숨죽여 읽었습니다.

분홍과 회색이 묘하게 겹친 책의 예쁜 디자인처럼, 다가올 봄에 어울릴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소설의 배경이 봄이라는 건 아닙니다만) 책 디자인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무척 마음에 듭니다. 보통 이런 책은 겉에 종이 커버를 하나 씌워서 보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띠지가 없는 점은 정말, 정말 좋았습니다. 띠지 없는 책을 산 게 정말 오랜만입니다. 출판사의 용기와 디자이너의 감각에 경의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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