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_ 에게
날씨로 운을 떼는 건 진부하다지만 나는 안부만큼이나 날씨를 자주 물어.
너는 어떻고 네가 있는 곳은 어떠니. 봄이 왔니?
솔직한 말로 입을 떼야겠다. 나에게 글을 쓰고 편지를 쓰는 일은 물에 잠겨 있다 숨을 쉬러 뭍으로 나오는 일과 같아서, 삶에서 여러 순간을 마주하면 먼지처럼 귀 끝에 혹은 가래처럼 목 끝에 얹혀서 한참 쌓이다 기침처럼 내뱉어지는 불가항력의 행동이나 다름없어. 그리고 가끔 나는 기침으로부터 완쾌하고는 한다. 아주 간단한 말로는 쓸 말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 아침까지도 (((뭐를 써야 하지)))하는 생각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 당황했어. 근래에 아무 일도 없던 건 아니니 무얼 했고 무얼 먹고 놀아났는지 적으면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편지는 일기가 아니기 때문에 너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 뱉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말을 해야 한다는 고집 같은 책임감으로 주먹을 꼭 쥐었어.
그리고 배나 먼저 채워야겠다 싶어 요거트를 들고 찾아간 공용 부엌에서 실마리를 찾았지.
너는 운명을 믿니?
나는 우연을 믿어.
기억은 이상하고 제멋대로인 체계 아래서 움직이는 게 분명하지. 예전에 어느 겨울날 J는 우리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네가 마시고 있는 음료 메뉴가 무엇인지까지 똑똑히 기억해 두고 싶다고 했어. 한참 뒤 편지에서 그 애는 그때 너는 --를 마시고 있었다고 복기까지 해주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을 기억하지 못해. 내가 마신 무언가까지 기억하는 J를 기억할 뿐이야.
확률의 세계에서 어떤 과거는 기억되기를 당첨되곤 해. 별거 아닌 순간이 한참 머리에 머물기도 하지. 어릴 적 아빠가 나를 목말 태웠고 엄마가 내 머리가 천장에 찧을까 싶어 걱정하던 아주 짧은 순간은 내 최초의 기억이고 이건 아마 우연이겠지.
지난했던 의무 교육에서도 머릿속에 우연처럼 확률적으로 채택된 개념이 몇 있어. 지금 막 떠오른 건 삼묵법. 초등학교 때 실수로 수묵법이라 적어 틀렸거든. 그리고 생뚱맞은 건 서안 해양성 기후. 그런데 이건 운명 같은 우연이라 생각해.
기억나니. 삼월 첫 달에 얘기했던 아이슬란드 여행기. 그곳에 나는 런던에 있는 H 양과 함께였다고 했지. 런던과 암스테르담은 바다를 하나 두고 있는데,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도시이기도 해서 많은 걸 공유한다. 그리고 H 양과 나도 많은(잦은) 안부를 공유하는데 날씨와 그날 먹은 밥이 주된 주제. 그러다 깨달은 게 있어. 거기에 비가 오면 여기도 비가 오고 여기에 해가 뜨면 거기도 해가 뜨는. 우연이라기에는 반복되는 유사한 날씨. 우리는 빙고를 외치듯 서안 해양성 기후라 그런가 보다고 말했어. 머리에 오래 남은 그 개념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작은 퍼즐 조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돼.
이어지는 우연. 사실 이 얘기는 부엌에서 시작됐다고 했지.
부엌에 가자 간만에 플랫메이트 M을 만났어.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와 이름이 같은 M은 핀란드에서 왔고, 북유럽의 거리 두기처럼 수줍음을 타지만, 농담처럼 마르코 폴로 브랜드 티를 종종 입고 (알아봐 주길 기다리고), 콧수염이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 어느 밤에 파티를 함께 갔고 이것저것 속 얘기를 많이 한 뒤로 부쩍 편한 사이가 되었어.
오랜만에 마주한 거라 잘 지냈냐고 물어보니 지난 주말 동안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다녀왔다고 했어. 지난달 베를린에 다녀왔기도 하고 워낙 좋아하는 도시니까 신나서 어디를 갔고 어떤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지. M도 신나서 답을 했어. 그러다 내게 덜컥 그런데 너 어디서 머물렀냐고 물어왔다. 나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알렉산더 광장에 있는 G 호스텔에서 머물렀다고 했고, M는 입꼬리를 올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연!
우리가 파티에 갔던 밤에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의 우연이 교차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어. 암스테르담에 언제 도착했고 어떻게 적응해 가고 있는지를 얘기하던 중에, 나는 새 환경에 압도당하는 게 싫어서 일주일 정도 일찍 와서 호텔에 머물렀다고 말했고, M은 비행기가 취소되어 어쩔 수 없이 더 이른 편을 타고 와서 호텔에 머물렀다고 했어. 나는 호텔이 기숙사 근처였냐고 물었고 M은 그렇다고, F 호텔이라는 곳이었다고 부연했지. 그리고 그곳은 내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어. 우리는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곧 서로를 마주할 미래를 모른 채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몇 번이고 확인했지. 지도를 보여주었고 친절하지만 사무적인 접수대 직원 얘기를 했고 맞은편 T 레스토랑에서 마르게리타 피자를 포장해다 먹었단 사실까지도. 그리고 오늘 아침 또다시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어. 이번엔 물론 엇갈린 시간이었지만 공간으로 꿰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의 우연 얘기도 하나.
나의 친절한 플랫메이트 J(내가 마신 음료를 기억한 그 J와는 다른)는 박물관에 함께 다녀오는 길에 재미있는 얘기가 떠올랐다며 운을 뗐었어. J는 보스니아 사람이지만 세르비아에서 공부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베를린에 있는 남자친구가 있어. 그리고 남자친구는 교환학생으로 온 여자와 우연히 대화를 나눴는데, 그 여자가 세르비아에서 왔다고 하자 자신의 여자친구도 세르비아에서 공부를 한다고 대학이 어디냐 물었고, 그 여자가 J와 같은 곳에서 공부한다는 걸 알게 됐대. 혹시나 해서 J를 아냐고 물었고 당연히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여자는 모른다고 답했대.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 어느 학기의 개강 날 J는 첫 수업 날 지각을 해서 부랴부랴 뛰어 들어갔고, 백 명은 거뜬히 듣는 대형 강의라 아무 빈자리에나 앉았대. 그리고 옆자리 여자는 대뜸 J에게 혹시 남자친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하지 않느냐고 수상할 정도로 자세한 질문을 건네 왔대. 이 년 전쯤 남자친구와 대화를 나눴던 그 여자는 이제 세르비아에 돌아왔고 어떤 이상한 인력처럼 J는 많은 선택지 중에 하필 그 여자의 옆에 앉게 됐다는 이야기. J는 이제 그 여자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 중 하나라고, 세상은 좁고 이상하다고 했어. 이야기를 마친 J의 입꼬리는 마치 M의 그것처럼 휘어 있었지.
두 동떨어진 순간은 가끔 하나로 꿰어지곤 해. 그걸 휘어진 입꼬리처럼 꿰어내는 것이 우연이라고 나는 믿어. 이해하지 못한 과거가 현재로 갑자기 밀착해 올 때, 어떤 계획처럼 하나의 선형으로 놓일 때가 분명 있지. 지루한 수업 하나를 끝내고 그 강의실 앞에 앉아 편지를 타닥타닥 써 내리는 오후 세 시 오십칠 분의 과거는 이대로 봉해지고 이렇게 매듭지어지더라도 언젠가의 현재로 금방이고 달려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아주 낙관적이야.
요즘 읽은 소설 구절이 좋아서 함께 부치려고 죄다 저장해 놨는데 그게 담긴 아이패드를 두고 와 버렸다. 소설은 다음으로 미루고 영화 한 편을 추천할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본 웨스 앤더슨의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단편으론 길고 장편으론 짧은 40분의 러닝타임. 말이 많고 서글프지만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전형이야. 연극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이렇게 찍었더라면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극적이고 우화적인 이야기. 머리를 크게 쓰고 싶지 않을 때 식히는 용도로 봐도 좋을 거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어.
추신.
네게 벌어진 가장 우연 같은 일은 무엇이었니?
혹은 현재로 꿰어 오고 싶은 과거의 순간이 있니?
2024년 3월 18일
캠퍼스 11층 구석에 앉아서
우연을 꿰매며,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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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2 - 2024 MAR 18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