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불러줘
_ 에게
한 주가 단박에 달아났다!
그리고 라디에이터 선반 위에 놓아둔 분홍빛 카네이션 다발은 죽지 않고 펴 있어.
막 쳇 베이커에서 오스카 피터슨으로 플레이리스트가 넘어가는 중.
쳇/챗/챋/쳍/쳊/… 베이커/배이커/배커/…
이름을 표기하는 건 늘 까다로운 일이야. 어떻게 쓰든 간에 따라갈 수 없는 원어와의 간격이 있어서 말이지.
기억이 흐릿하지만 이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시아인이 서구권에 도달했을 때 이름을 바꾸게 되는 순간. 중국계 사람이 나왔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뜻이 있는데 그런 이해가 없는 문화권에서는 허울뿐인 이름이 되어버린다고, 그건 새 이름을 지어 불리는 것과 다름없으니 다른 이름을 골라 쓰는 거라고 말했어.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이름 가을은 개을, 가울, 카일, 게일, … 따위로 변조되어 읽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리고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사전 속 단어를 고스란히 훔쳐 베껴 온 나의 이름에 아주 의식적이야. 언젠가 무더운 여름 아주 습했던 촬영 현장에서 선배 F가 가을아 하고 나를 불렀을 때, 옆에 있던 어느 남자는 이름이 주는 효과가 있긴 한가 보다고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시원하다고 농담했지. 그런 이름에 새긴 뜻은 발음이 변형되는 순간 사라지고 말아.
네게 금요일마다 네덜란드 온 도시의 박물관을 다니는 수업을 듣는다고 얘기한 적 있는 것 같다. 지난 금요일엔 로테르담에 다녀왔어. 잠깐 딴 얘기로 새자면, 그곳은 베를린처럼 세계대전 동안 포격을 맞아 초토화된 도시였고, 거의 유일한 잔재인 아주 오래된 교회 하나를 빼면 모조리 새것처럼 높고 세련된 빌딩이 가득한 곳이었다. 박물관이 아니라 박물관 소장품을 보관하는 아카이브에 다녀왔는데, 그곳의 소장은 우리에게 암스테르담 사람들이 로테르담은 모든 게 파괴되어 역사가 없다고 할 때가 있지만, 도리어 파괴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살아 숨 쉰다고 자부심에 차서 말했어. 아카이브엔 폭격과 폭발 속에서 부서진 유래 깊은 건물의 문이나 기둥, 조각상 같은 것들이 한가득하였다. 마치 연극 무대 뒤 세트장 같기도 했어. 나무판자 하나를 두고 그것을 집이나 성이라고, 혹은 다른 세계라고 칭할 수 있는… 그런 환상과 사실이 혼재된 곳.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수업이 끝나고 나는 로테르담에서 공부하는 프랑스 여자 E를 만났다. 지난 학기 한국으로 교환학생으로 왔고 마침 버디 프로그램을 하던 나와 우연히 만나게 됐었어. 여름날 처음 만났었는데 우린 들입다 아주 속 깊은 얘기를 했었고 부쩍 가까워졌지. 오랜만에 만난 E의 파란 눈동자는 역시나 투명했다! 그리고 E가 머무는 플랫에 가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도시를 쏘다녔지. E는 나의 나라를, 언어를,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 중 하나야. 친구들에게도 나의 이름을 고스란히 전해 소개해 줬지. 그리고 이것저것 서로의 근황을 캐묻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E는 자신이 내 이름을 옳게 발음하고 있는지 물었고 그렇다고 답하자 여기서 이름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되물어 왔어. 여기서는 나를 가을이 아니라 Autumn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답했지.
가끔 진짜 이름이 뭔지를 물어오고 그 이름으로 부르려는 사람이 있고, 갑자기 들입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주는 교수가 있고, 한술 더 떠서 번역기를 쓴 건지 한국어로 메일 답신을 보내는 교수도 있지만… 여기서 나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른 언어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이름으로 사는 일은 일종의 페르소나를 새로이 조립하는 기분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살아온 페르소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해.
언어와 실체는 자의적이고 기표와 기의는 서로로부터 미끄러진다는 걸 생각하면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우연적 결합이 좋아. 내 이름이 대뜸 Justin이나 Paul이 됐다고 하더라도 난 그 이름들을 무척 좋아했을 거야. 하고도 많은 음성 속에서 합쳐진 무작위의 단어가 스스로를 규정해 주는 핵심처럼 마음 한가운데 박혀 있는 것만 같지 않니. 발레리가 말한 시는 언어로 추는 예술, 이란 구절을 오래 간직해 왔어. 이름은 언어의 짝짓기 혹은 운명 짓기 같다.
암스테르담에서 읽을 시집으로 명시 100선과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을 가져왔는데, 그중 시 한 편을 동봉해. 제목은 개 같은 가을이. 처음 제목을 읽었을 때는 조금 움찔했다 하하. 겨울에서 봄으로 흘러가는 어느 시점은 가을 같기도 해. 계절 얘기를 두 편에 이어서나 한 셈이 됐네. 시는 천천히 읽어보길! 참고로 나는 마지막 행을 아주 좋아해.
편지는 서로의 이름을 공고히 부르게 해 주지.
이름을 한껏 듣는 한 주를 보내길!
끝으로 또다시 추천하고 싶은 노래!
Laufey는 선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아이슬란드 출신의 가수야. 그녀의 노래를 듣기 시작한 지도 일 년이 넘었다. 피기 시작한 꽃이나 나무 아래를 거니면서 혹은 햇빛을 받으면서 들어보면 좋을 노래. 아주 올드패션한 사랑을 믿게 돼.
추신.
재밌는 질문. 너도 영어 이름이 있니?
(어렸을 때 학원에서 지어줘서 고등학교 때까지 Rosie라는 이름을 썼어 나는)
2024년 3월 11일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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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2 - 2024 MAR 11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