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베를린 영화제로부터 날아온 편지
* 본고는 PC 버전으로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_ 에게
벌써 이월의 마지막 월요일이야!
어제까지 나는 베를린에 머물렀고,
그곳은 해가 쨍하게 떠 있었으며
나는 아주 많이 걸었어.
돌아온 단상이 아니라 그곳에서 깨적인 엽서를 부친다.
엽서 하나,
여기는 베를린!
영화 두 편을 보고 자정이 넘어 겨우 숙소로 돌아와 몸을 뉘었어.
오랜만에 방문한 (혹은 돌아온) 도시에서 길을 숭덩숭덩 찾으며 거리를 활보했어.
여전히 알렉산더플라츠 뒤에 있는 케밥집은 장사가 잘 돼 분주했고 참 맛있었다!
한두 단어라도 주워들을 수 있는 독일어가 조금은 반갑기도 해.
겨우겨우 감사합니다. 저기요. 죄송합니다 만 독일어로 내뱉고는 있지만..
오늘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봤어. <여행자의 필요>.
아주 큰 영화관에 너무나 많은 관객이 들어차기에 흠칫 놀랬다.
영화는 역시나 황당하고 재치 있는 대사들도 가득했어.
그렇지만 내용보다도,
내가 (적어도 절반 이상) 더 잘 아는 문화의 영화에 반응하는 외국인.. 을 본 것이 더 인상 깊어
자리가 없네
나중에 덧붙일게.
영화제는 아주 멋있어. 조금은 졸립다
2024.02.20.
엽서 둘,
안녕! 잘 지내지?
나는 베를린에서 가장 애착 있는 곳,
museumsinsel에 와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페르가몬 박물관의
기념품 코너에 앉아 있어.
museum sinsel (정말 섬처럼 분리되어 있어)
이년 전 이곳에서 바빌론의 유적을
그대로 떼어다 가져온...
이 Ischtar-Tor를 잊지 못해
이 엽서로 골랐어
정복이란 이름아래
절도되고 강탈된 유물들이 널려 있다
아마 전개도대로 잘라 만들면
다리가 완성되는 모양인 엽서.
잘라 붙이면 나도 유물을
도적질 하게 되는 걸까?
언젠가 베를린에 온다면 이곳,
박물관섬에 꼭! 오길 바라.
특히 여름, 박물관 앞 정원은 푸르고 아름다워.
손으로 쓰니 번지고 난리다.
줄일게.
Tschüss!!
2024.02.21.
엽서 셋,
Hallo! Wie geht's?
베를린을 떠나기까지 다섯 시간 남짓이 남았어. 어제는 빅풋과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를 봤어. 외국어 자막을 읽고 듣느라 조금은 피로해서 오늘은 쉬기로 했어. 대신 2년 전부터 궁금했던 Museum fur Fotografie에 다녀왔다. 이 엽서도 그곳에서 샀어. 여성 나체(...)를 좋아하는 듯한 사진가의 전시를 본 후 1910-70년대 사진을 조망하는 전시를 봤어. 시대를 따라 격동하는 프레임. 그 속에서 아방가르드한 표정, 뇌쇄적인 도시, 요동치는 실루엣을 보았다.
있지 너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니? 관광지에 가서 기념사진을 꼭 남기는 편이니? 오늘 전시를 보면서 나는 왜 그간 그렇게나 기념사진을 찍을 때 마음이 쑥스러웠는지를 깨달았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사진은 늘 파도가 치거나 바람이 불고 그래서 잔디가 흔들리고 머리칼이 흩날리는.. 정말 삶 속의 어느 순간을 수박 서리하듯 절도해 낸 것이었어. 그게 어쩌면 사진의 탄생목적일지도 몰라. 연속된 시간을 토막 내어 프레임에 가두는 것. 그렇지만 기념사진은 스스로가 토막이 되어 프레임에 제물처럼 바쳐지는 것만 같아. 주객전도랄까.
이년 전보다 가격이 오른 케밥집과 커피집에서 새 시간을 만들고 또 수박서리하듯 사진을 찍었어. 편지엔 그 토막 난 순간들의 향취가 조금이라도 묻어났길. 봄에 다시 서신 할게.
Bis später,
Schönen Tag!
2024.02.22.
글씨가 곱지 못해 미안.
손편지의 묘미를 다시 느꼈다. 쓰면서 문장의 향방이 정해지는 것. 이월에 들어 네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여러 번 썼다 지우고 문단을 재조립하기를 반복했어. 문법과 맞춤법도 점검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베를린 어느 호스탤 침대에서 엎드려 쓴 첫 엽서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죄다 잊고 하려던 말은 정작 하지도 못한 채 끝맺게 됐다. 그 이후로는 나름 모양새를 갖춰 썼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글쎼.
중세 유럽, 수도사들의 주 업무 혹은 의식 중 하나에는 성경 필사가 있었대. 우리로 바꿔 생각하면 팔만대장경과 같은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신실한 마음을 돌 혹은 종이에 새기는 행위. 사진 박물관에는 19세기 이후 글의 시대는 끝나고 이미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쓰여 있었어. 이제 우리는 마음을 찍어야 하는 걸까? 나는 손으로 뭔가를 끄적이고 싶다. 오탈자가 나든 내용이 어긋나든 엽서에 잉크를 묻히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
지금 암스테르담은 24일 토요일 막 자정을 넘어섰고, 아침에 나는 아이슬란드로 떠나. 베를린으로 향할 때 비행기 바깥으로 구름이 설산처럼 깔려 있었는데, 이젠 설산이 구름 지어 있는 곳으로 가는 셈이지! 늦지 않으려 미리 편지를 썼다. 그러니 오늘의 서간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우편이지. 어쨌든 실물로 쓰였(었)고, 미리(예약) 발송되었으며, 우체국(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니까...라고 각종 주석을 달아본다.
계절이 바뀌겠구나.
많은 것이 새로 시작될 문턱 앞에서 만나자.
추신.
아주 진부한 질문!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니?
2024년 2월 26일을 향해
아마 아이슬란드에서
눈을 파헤치며,
가을
답신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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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1 - 2024 Feb 26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