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여행기
_ 에게
안녕, 여기는 암스테르담.
이곳에 도착한 지는 어언 한 달을 넘어섰고,
찌뿌둥하던 날씨도 어제부터 개기 시작했어.
계절은 봄부터 헤아리지. 돌고 돌아 다시 시작점.
삼월은 늘 내게 부산스러웠는데 너는 이 계절 앞에서 어떤 시작을 앞두고 있니.
달리기 시작할 때 내쉬는 첫 숨처럼 경쾌한 마음으로 엽서를 쓴다.
직전의 여행을 얘기하고 싶어.
해가 높이 뜨기 전에 어딘가를 훌쩍 다녀왔거든.
이번 여행은, 런던에 머무는 H 양과 나눈 작당 모의에서 시작됐어. 우리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북쪽을 향해 대각선으로 날면 있는 아이슬란드는 일종의 중간지점이었거든. 오로라를 보자고 우리는 줄곧 노래를 불렀었고, 봄기운이 북쪽으로 밀려오기 전 기회를 틈타 같은 바다를 건너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른 아침 비행기였던지라 얕은 잠에 들었어. 그러다 구름을 보고 설산이겠거니 착각도 했다. 내려 보니 구름처럼 설산이 드넓게 깔려 있었어. 삼사월까진 거뜬히 춥다는 말이 어디 안 간다는 듯 시린 바람이 얼굴과 손을 스쳤고, 이미 몇 겹씩 껴입었는데도 서늘했어.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는 암스테르담보다는 아주 추웠고, 구름으로 가득한 암스테르담보다는 아주 맑았다. 한국의 볕 잘 드는 몹시 춥고 맑은 어느 겨울날 같았어.
공항에서 무사히 H 양과 만났어. 공항이 레이캬비크로부터 떨어져 있는 탓에 H 양과 나는 여러 겹으로 무장해 뻣뻣하고 둔해진 몸으로 시내버스에 올라탔어. 다른 나라로 여행 갔을 때 너를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게 무엇이니. 내겐 대중교통이 그것이야. 승차하고 문이 닫히는 그 짤막한 시간이 주는 긴장감이 있거든. 의도치 않게 무임승차자가 될까 봐 연신 이용 후기 같은 것을 미리 읽어두고는 해. 하지만 결국은 버벅대다 옆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다른 사람을 흘깃 쳐다보고 따라 하게 되더라. 어찌 됐든 표를 사고 문제없이 차에 올라타고 나면 아주 무거운 짐을 호텔 방에 푼 듯 한결 가벼워져.
그리고 자리에 앉았는데... 우리가 앉은자리만 역방향으로 놓여 있어서 한 시간 내내 버스 나머지 전체의 사람들과 눈빛을 교환하며 가야 했어. 황당하고 웃겨서 키득대다 어색한 시선을 피하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H 양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거짓말 같은 풍경이었거든. 나는 황급히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카메라였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 네덜란드에서 나의 카메라는 무용지물이 되어 한동안 방 한구석에 오브제처럼 놓여 있었어. 무엇을 위해 돈을 모아 저것을 샀나(...)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 그 값을 치르기 위해 이번 여행에 동행했다!
사진으로 돌아와서. 마을 앞 언 호수를. 거니는 형체. 창문 유리 위로 비치는 흐릿한 버스 내부와 또 반사되어 비추는 노란 햇빛. 볕이 들자 눈밭은 아주 백색으로 푸르게 빛났고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이 도로를 끼고 내내 이어졌어. 아이슬란드에서는 몇 살인지를 묻지 않고 몇 번의 겨울을 지냈는지 묻는대. 혼자 호수를 걷는 남자는 겨울을 몇 번이나 지나쳤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이런 피사체를 좋아한다.
역광에 놓인 피사체. 그림자처럼 실루엣만 남으면, 그게 무엇이든 자유로이 연결되고 분리되고 또 합쳐져. 나는 어릴 때 자기 전 램프에 손을 가까이 대고 개나 토끼 따위를 만드는 그림자놀이를 하고는 했다. 바다 위에서 천을 펄럭이는, 하염없이 해안가를 걷는, 모래를 매만지는,... 그 모든 행위는 한 사람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처럼 보여. 그런 착각을 하게 돼.
우스울 정도로 동그란 돌과 높이 몰려오는 파도, 세월에 깎인 현무암 기둥, 이런 자연은 마치 내가 태초의 행성으로 돌아간 듯한-혹은 다른 행성으로 다다른 듯한- 착각을 하게 했어. 내가 향했던 곳은 검은모래해변. 돌이 아주 둥근데 그걸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하면 운수가 안 좋아진대서 돌을 만지고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두고 왔어. 그 둥근돌은 검은 모래와 있어야겠지. H 양과 나는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갑자기 거세게 들이친 물보라에 놀라 뒷걸음치듯 해안을 떠났어. 하지만 우리는 또 이 기억을 오래 간직하게 되리라 되뇌었지.
거대한 폭포 옆엔 튀는 물방울과 햇빛이 만나 생긴 무지개가 떠 있었지.
얼음 있는 나라, 라는 이 단순한 지명에는 미신이나 정령, 트롤 이런 꿈같은 것들이 있다고 믿게 하는 간결한 힘이 실려 있었어. 검은 땅을 덮은 하얀 눈. 너무 하얘서 푸르게 보이는 설경. 일출 때에 곳곳은 푸르고 몇몇은 붉었어. 그리고 이런 무지개. 흑백으로만 가득해 보이는 이 행성 같은 나라는 우리로선 어찌할 수 없는 인력과 척력이 작동해서 판과 판 사이를 밀어내고 용암을 밀어내고 뜨거운 물을 매분 분출해 내는 살아있는 땅이고 지구였어.
아이슬란드는 지질학자나 생태학자에겐 거대한 연구소나 다름없을 거야. 화산, 폭포, 간헐천,... 판의 경계에 있다는 생태공원에서 우리의 당일 여행 가이드 M은 몹시 들떠 수렴형 경계라든지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 판이라든지 과학 시간에 흘려들었던 익숙한 단어들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어. 폴란드에서 이곳으로 교환학생을 왔다가 아이슬란드에 갇혔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M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느 곳으로 떠난 줄 알았는데 도착한 것이었다니. 그러니 너도 조심하도록 해. 여행인 줄 알았던 게 네 삶이 되고 도착지가 네 거주지가 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우리 여행의 본 목적으로!
밤에 떠난 오로라 헌팅은 말 그대로 사냥이었어. 우리의 당일 드라이버 겸 가이드이자 헌터였던 이름 모를 아저씨는 차를 상당히 빠른 속도로 몰았어. 오로라를 보기 위해선 하늘이 맑고 달빛이 약해야 한다는데 H 양과 나는 달이 아주 센,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센, 정월대보름에 그곳을 찾았어. 점차 차 안의 다른 무리도 낙담하기 시작했어. 밖에 서서 쏟아질 것처럼 가득 찬 별을 보며 어릴 적 빠져 살았던 별자리 이야기를 H 양에게 해주었지만 이젠 기억력과 소재가 바닥나버렸지. 자정을 넘어 새벽 한 시 즈음이 되었을까, 이제 레이캬비크로 다시 돌아가는 길 몇몇은 잠에 들었고 H 양과 나는 아쉬운 마음에 창가를 자꾸 바라봤다. 급작스레 아저씨는 속도를 높이더니 몇 번의 코너링 끝에 차를 급히 세우고 다들 내리라 했어.
어리둥절해 내렸더니 하늘에는 오로라가 있었다.
하늘에 무언가가 일렁였다 사라지고 옆으로 움직였다 돌아오기를 반복했어. 태양에서부터 날아온 작은 입자가 공기에 부딪히면서 나타나는 게 이 푸른 일렁임이라는데, 꼭 누가 하늘 위에서 가루를 뿌리는 손장난을 치는 것처럼만 같았어. 다른 무리도 들떠서 사진을 찍고 발걸음을 가벼이 했어. 돌아가는 길에 또 오로라가 다시 보여 차를 멈춰 세우고 바깥에 나서 하늘을 바라봤다. 아저씨는 각각을 10점 만점에 7점, 9점을 매겼고 이런 점수 상승에 모두 아이처럼 즐거워했어. H 양은 이 아저씨는 평생 오로라를 천 번을 보셨겠지... 하며 시기 질투했어.
하고 싶은 얘기가 차고 넘치는데 아직 언어로 정렬되지 않았어. 눈에 선연한 이미지들. 그것을 오래 간직하겠다는 것만 얘기할 수 있겠다.
끝으로 계절을 맞아 추천하고 싶은 노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야. 봄을 축하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노래에는 숨은 계절이 있어. 원곡 <Aguas De Marco>는 남미에서 쓰여 여름의 끝을 노래하는 곡이지. 영어로 번역되면서 우리에겐 봄처럼 느껴지지만 말이야. 어느 곳은 내내 여름이고 어느 곳은 내내 겨울, 아이슬란드는 여름과 겨울뿐, 남미는 지금 여름의 끝, 북반구에 있는 나와 너는 아마 봄으로 향하는 중. 모든 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어. 그래, 다자이 오사무는 여름 동안 가을은 이미 몰래 숨어 들어와 있는데, 사람들은 폭염에 속아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했지. 우리는 모든 계절에 항상 속는다. 그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르고.
가사를 남길게.
봄을 맞이하자.
a life, the sun
a night, a death
the end of the run
and the river bank talks
of the waters of march
it's the promise of life
it's the joy in your heart
추신.
답신의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 이번 3월을 맞아 새로이 시작하게 된 것이 있다면?
- 타지 여행에서 겪은 아주 곤혹스러웠던 일이 있다면?
2024년 3월 4일
다시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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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2 - 2024 MAR 4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