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으로 일주일 다시 읽기
_ 에게
잘 지냈니?
너에게 자랑스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아침이 오기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어.
드디어 삶의 궤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리듬을 충분히 즐기고 있지.
으하하.
별안간 무슨 궤도며 리듬이냐고 한다면 지난달에 내가 보냈던 편지를 네가 깜빡했단 소리 (혹은 내가 편지를 네게 미처 부치지 못했거나).
있지, 토요일 아침에 아침 열 시에 눈이 떠졌고, 정오쯤 배가 고파 주방에 나가 푸실리 아라비아따 파스타를 차려 먹었고, 우연히 마주친 플랫메이트 E가 날이 좋으니 폰델공원에서 공부하자고 하기에 따라 나갔다가 수가 불어 플랫메이트 M과 또 다른 M이 합류해 넷이서 자전거를 타고 떠났고, 오후 서너 시까지 공원 어느 카페 테라스에서 카푸치노 한 잔 마시다가 우박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안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저녁 여섯 시 즈음 돌아가는 길에 다 같이 장을 보러 갔는데 그러다 우박을 또 한바탕 맞았고, 타코를 간단하게 해먹은 후에 과제를 조금 했고, 밤 아홉 시에 E와 주방에서 다시 만나 그 애의 닌텐도로 게임을 하고, 한참 후에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쓰고, 그러다가... 새벽 한두 시쯤 잠들었어.
암스테르담에 온 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요즘. 나는 이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에 패턴이 생겼고 또 리듬이 깃들었다고 느꼈다.
글씨가 곱지 않은 건 알지만 일기를 텍스트로 옮겨 적는 것은... 낯부끄러우니까 생략할게.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그리고 토요일처럼 이번 주의 다른 날들에도 정말 별일 없었어. 나열이 가능하고 동시에 생략해도 상관없는 일들로 가득했지.
영화 <패터슨>을 본 적 있니? 웬만하면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나는 그 영화를 두 번 봤어. 대학에 입학한 직후에 한 번, 거의 이 년이 지났을 법한 때에 다시 한번. 첫 번엔 지루했고 따분했고 두 번째엔 기묘한 안정과 평화를 느꼈던 거로 기억한다. 어떤 영화냐면, 버스 운전기사인 패터슨이 매일 아내 옆에서 일어나고, 출근하고, 운전하고, 개를 산책하고, 펍에 가는, 그리고 짬짬이 시를 쓰는, 그 사이 소동이랄 것들이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활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런 아주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라 해야겠다. 짐 자무시의 연출인지라 역시나 상당히 시적이고 그가 인용해 오는 다른 시인의 시도 젊고 감각적인데, 기억으로는 뉴욕 어느 시파의 것들이랬던 거 같아.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끌어다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그런 사조의 시들.
월요일. 늦잠 자기. 수업을 들으며 편지를 써 보내기. 페달을 밟아 나무 아래를 내달리기. 빨간 코트를 입은 백발의 여자를 보기. 돌아와 파스타를 하기. 야밤에 체육관에 나가 운동하기. 독일어 문장 다섯 개 공부하기. 까무룩 잠에 들기.
화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 날이 좋아 공원으로 향하기.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기. 산책하던 강아지의 공을 대신 던져주기. 또 파스타를 하기. 독일어 문장 쓰기를 까먹고 잠들기.
수요일. 함께 운동하기. 장을 보기. 또 파스타를 먹냐고 핀잔 듣기. 독일어 문장 열 개를 공부하기.
목요일. 일어나 독일어 문장 다섯 개를 쓰기. 책을 읽다가 울기. 아마 쇼코의 미소. 기진맥진한 채로 주방에 향하기. 한식을 간단하게 해 먹기.
금요일. 과일과 시리얼을 먹기. 차려입고 로테르담으로 향하기. 카페에 눌러앉아 과제를 한참 하기. 유명 중식당에서 우육면을 먹기. 조성진의 피아노 공연을 듣고 인터미션에 와인 한 잔을 마시고 마저 오케스트라를 듣기.
세계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작년 서울에서 아마도 비슷한 일주일을 한 번쯤은 보냈을 거야. 아주 예측 가능한 나날들. 약간의 변주나 뒤틀림을 제하면 비슷하고 평이한 길만 내내 걷는 기분이 들던 때가 있었어. 하지만 그러다가도 꼭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처럼 큰 균열이 일어나 이전의 길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때가 와.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찾아오는 시작과 끝도 참 많지. 작별 인사인 줄 모르고 한 마지막 인사도 넘치도록 많을 거야. 그리고 숱한 월요일이 다시 온다.
서향인 나의 방에서는 해가 지는 하늘이 보이고 그 해가 지는 시간이 점점 늦어져서 빛이 점점 오래 방에 머물기 시작했어. 오 분마다 비행기 한 대가 하늘 위를 지나가 나의 맞은편 서쪽으로 날아가지. 나는 그러면 서쪽으로 달려가 보고 싶어진다.
오늘 우박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깰 만큼 좋지 않은 날씨에 하루 종일 방에 있었어. 해질 녘쯤 찌뿌둥한 느낌에 매트를 펴 스트레칭을 했지. 틈틈이 하늘을 봤어. 몇 대의 비행기가 지나갔더라. 여기로 날아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더라. 얼마나 많은 월요일을 보냈더라. 이건 너에게 아홉 번째로 써 부치는 편지. 아, 아홉 번의 월요일이구나.
네가 <패터슨>을 봤으면 좋겠다.
지난주에 책 구절을 보여준단 걸 미뤘었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주 오래전 이미 잘 알려졌지만 내가 아주 늦게 읽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 못나고 삐죽한 마음을 쓴 소설. 스크랩해 둔 여러 구절 중 하나를 아무거나 골라 왔어. 나의 몸은 암스테르담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와 달리 살고 있나 봐. 우리의 몸은 같은 패턴이더라도 다른 공간 아래에서라면 달리 춤을 춘다는 걸까? 서울에서, 천안에서, 대구에서, ...
짧은 방학이 오고 있어. 곧 나는 에든버러로 떠나고 런던까지 들르는 여정에 올라. 거기에도 나의 몸을 매어 두고 오고 싶다.
사월이 온단 건 이제 새해란 이름은 무색해지고 일상이 정말 평범한 것으로 느껴지는 권태가 찾아온단 얘기겠지. 기억할 수 없는 요일이 쌓이고 주가 지나고 달이 넘겨질 거야. 지루하고 지난해 보이는 무언가를 담백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다. 방법을 안다면 알려줘.
다시 편지할게. 다가온 월요일이 반갑길!
추신.
요즘 너의 몸(과 일상)을 매어 둔 공간은 어디니?
2024년 3월 25일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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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2 - 2024 MAR 25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