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와 런던 곳곳의 맛집을 찾아서...
_ 에게
안녕, 너한테도 간절히 믿는 거짓말이 있니?
나는 죽은 뒤의 세계를, 우주 어딘가의 외계인을, 네스호에 네시를 믿어.
뭐라도 있다고 믿으면 덜 외로워지는 법이거든.
처음으로 온 스코틀랜드는 광활하고 드넓고 춥고 눅눅하고 슬펐어.
그리고 인구가 많지 않은 북부 고지대에 다녀왔다. 네시를 보기 위해서!
가던 길에 눈이 내렸고 도착해서는 비가 내렸고 돌아오는 길엔 해가 쪘어.
호수는 아주 검었어.
물이 아주 차갑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우연히 말을 튼 I는 살짝 손을 담갔을 뿐인데 너무 차가워서 한참 손을 세면대에서 녹였다고 그랬어.
나도 호수 근처를 걸어볼까 했는데,
그러면 네시가 갑자기 튀어나와 나의 손을 물고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지는 않았어.
호수에 다녀온 지금 나는 아직도 네시를 믿어.
더 많은 거짓말을 믿고 싶다.
20240327 Edinburgh 가을
거짓말처럼 찾아온 사월! 어쩐지 기분이 좋은 시작이야.
올해 첫날이 월요일이어서 깔끔한 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사월 첫날도 월요일이라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서 떨어지는 숫자를 보면 뭐라도 벌어질 것 같단 착각을 해.
시간도 바뀌었어. 어제부터 갑자기 이곳은 한 시간 앞당기는 서머타임을 시작했어. 런던에선 H 양의 집에 신세를 졌는데, 그러던 중에 우리는 00:59의 다음이 02:00으로 넘어가는 그 신기하고 이상한 순간을 함께 목격했다. 이럴 때 보면 우리가 참이라 믿는 대부분은 우리가 참이라 믿기로 한 거짓…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
아, 그래 런던! 지난주 부활절 휴가를 바다 건너 옆 나라 영국에서 보내고 돌아왔거든. 늘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두 도시, 에든버러와 런던을 다녀왔다. 아직 여독을 푸는 중이야. 할 얘기가 산더미 같지만, 그곳의 음식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먹을 게 없기로 소문난 곳이라지만 떠올리면 입맛을 다시게 되는 맛난 걸 많이 먹었거든.
* MUMS Great Comfort Food, EDI
에든버러에 아침 일찍 도착해 후줄근한 마음과 배를 붙잡고 도착한 식당에서 먹은 스코티쉬 브랙퍼스트. 버터를 발라 넣은 토스트야 모두가 알 바삭한 맛. 베이컨과 소시지는 적당히 익어서 짭조름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식감이 여전했게 써니 사이드 업의 노른자를 소스처럼 찍어 먹어도 좋았다. 블랙 푸딩은 순대보단 간에 가까웠고, 포슬포슬하면서도 씹으면 뭉근히 으깨져서 느끼하기보단 고소했고, 버섯은 쫄깃하면서도 머금은 즙이 흘러나와서 레시피를 당장 물어보고 싶었어. 감자포테이토 스콘은 배를 든든하게 하는 담백한 맛이 있었고, 가운데 토마토는 짜고 기름진 맛 속에서 혀를 중간중간 중화해 주었지. (내가 아니라 남이 해준다면) 아침을 먹기 위해 부지런히 일어나게 할 용의를 충분히 주겠다고 생각했어.
* Bertie's Proper Fish & Chips, EDI
영국에 두 번째로 온 지금에야 처음 맛본 피쉬 앤 칩스. 길거리에서 난데없이 친해졌던 맨체스터에서 온 필리핀 부부는 내게 영국 음식 불평을 늘어놨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표 음식이 고작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 대화는 내 저녁 식사에 영감을 주었고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지. 두껍지만 바삭한 겉과 달리 아주 부드러운 더치식 감자튀김에 비하면 그다지 최고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두 번이나 튀겼다는 피쉬는 너무나 훌륭했다. 깨끗한 기름을 썼는지 아주 노랗고 밝은 빛깔의 튀김옷은 꼭 줄 서서 먹는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을 떠올리게 했고, 보기 좋은 모습만큼 맛도 좋았어. 그 안에 오동통한 대구 살은 퍼석한 일 없이 오독오독했어. 비리지 않아 레몬을 뿌리지 않아도 됐겠지만, 타르타르소스에 신선한 맛을 더해줘서 함께 곁들여도 좋았다.
* The Piemaker, EDI
최고의 미트파이를 먹겠단 일념으로 호기롭게 시도했다가 이미 실패한 전적이 있던 나는 마지막 날 반신반의하며 이곳에 들어섰어. 이름 때문에 불신했지만, 직원의 추천으로 치킨 앤 머쉬룸 파이를 주문했다. 나무 포크를 부러뜨릴 정도로 단단하게 구워진 파이 겉면을 나이프로 어찌 잘 갈라보니 안엔 닭고기와 버섯이 크림소스에 버무려 있었어. 이전에 실패한 파이는 안에 든 감자가 후추로 잔뜩 덮여 고기와 잘 어울리지 않았고 그 때문에 바깥 페이스트리 부분까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곳은 미트와 파이 사이 균형을 잘 맞췄더라. 묽은 크림소스가 딱딱한 페이스트리에 부드러운 질감을 더했고 달짝지근해서 속 재료도 잘 어울렀거든. 아주 감동을 주는 맛에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 잠깐 들러 소고기 지방 부분을 쓰는 스코티쉬 전 전통 파이를 먹었고 역시나 훌륭했어.
* Clarinda's Tearoom, EDI
여태 스콘에 대해 가졌던 인식은, 씹어도 쿠키처럼 와그작 씹히기보단 돌처럼 아작 갈라지고 그 안은 또 푸석해서 목이 막히게 하는… 최악의 디저트였는데 말이지. 이곳의 스콘은 이전까지 먹었던 스콘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줬어. 스콘을 반으로 갈라 버터를 조금 바르고 스코티쉬 크림과 잼을 차례로 얹었는데, 영국 본토와는 정반대로 스코틀랜드는 크림이 잼처럼 포근하게 잘 발라지고 잼은 되려 젤리처럼 탱글탱글해서 나이프로 으깨듯 발라야 했어. 한 입 베어 물면 돌이 아니라 솜처럼 저항 없이 푸릇한 빵과 크림의 입자와 달콤한 잼의 맛을 느낄 수 있었어. 러시안 카라반 티와 곁들였는데, 홍차처럼 시진 않고 우롱이나 아쌈이 들어가 좀 더 깊고 식물 같은 맛이 우러나서 속이 참 따뜻해졌었다.
* Emilia's Crafted Pasta (Baker Street), LDN
런던에 날아와 신세를 진 H 양, 그리고 지금은 캐나다로 돌아간 J를 통해 소개받은 E와 A, 또 그들의 친구 I와 함께 식사를 했어. 근사한 생면 파스타 집이었는데, 나는 월넛 크림 머쉬룸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어. 파스타에는 카세레체 면과 버섯, 그리고 갈린 견과류가 들어 있었어. 면은 아주 쫀득했고 호두가 들었다는 크림소스는 약간 되직했지만 신선하고 구수했어. 여행이 겹쳐 이렇게 우연히 런던 한복판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사실도 웃기고, 정작 우리를 묶어준 J는 저 멀리에 있단 사실도 신기해서 우리는 내내 즐거웠어.
* Beigel Bake Brick Lane Bakery, LDN
대망의 여행 마지막 날, 고맙게도 H 양은 나를 위한 도시 탐방 계획을 세워 뒀었고, 그중 하나가 브릭레인 거리였어. 이곳저곳 구경하다 출출해질 때 즈음 마치 비장의 무기처럼 H 양은 우리가 꼭 먹어야 할 베이글이 있다며 그곳으로 인도했고, 그곳은 무려 구글맵 리뷰 일만 개에 달하는 엄청난 가게였다. 꽤 긴 줄에 서서 기다리다 각각 남부식 치킨 베이글과 연어 크림치즈 베이글을 주문했어. 길거리 어딘가에 서서 작게 한 입 베어 먹는데, 뜯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할 정도로 탄력 있는 베이글이었어. 그렇다고 질겅거리지는 않았지. 안에 든 훈제 연어의 약간 비릿한 맛과 크림치즈의 꼬소롬한 맛이 풍미를 더했어. 이 감동을 나누려 옆을 보니 이미 H 양은 나한테 그 감동을 쏟아내고 있었지.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할 때까지 그 베이글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먹는 얘기만 한참을 했네. 있지, 나는 감각만큼 진실한 건 없다고 믿어. 특히 후각과 미각과 촉각이 그러하지. 그것들은 실제로 벌어져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잖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사람들이 차와 마들렌을 먹으면 잊힌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어떤 향과 맛과 느낌은 마음 깊이에 아주 오래 잠들어 있다가 다시 마주할 때 불쑥 떠오르곤 해.
밥을 같이 먹는 일은 아주 진실한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원한다면 우리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쓸 수 있지만, 맛없던 어느 날의 점심 식사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거든. 엄마의 해물 수제비나 집들이에서 우르르 해먹은 밀푀유나베나 촬영장에서 지겹게 먹은 도시락. 이런 것은 나 혼자 먹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먹어서 선명히 남은 것 같아. 여기서 나는 자주 혼자 먹어. 요리는 같이 할지 몰라도 자꾸 혼자만의 접시를 만들어 혼자 먹는다. 여행에서 얻은 맛까지 홀로 두기엔 슬퍼서 너라도 붙잡고 미각을 나눈다.
따뜻한 끼니들로 가득한 한 주 보내길 바라.
추신.
네가 믿는 가장 큰 거짓말은?
네가 한 가장 큰 거짓말은?
혹은 네게 벌어진 가장 큰 거짓말 같은 일은?
2024년 4월 1일
암스테르담에서
거짓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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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3 - 2024 APR 1st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