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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 사월은 제멋대로

우리의 사월과 로메르의 <녹색광선>

by 가을

_ 에게


April doet wat hij wil!


사월 내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대. 직역하면 April does whatever he wants, 4월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한다…라는 말. 그건 이곳의 사월은 날씨가 무척 변덕스럽기 때문이야. 여름처럼 덥다가 갑자기 구름이 껴서 쌀쌀맞아지고 바람은 태풍처럼 불기도 하는… 그런 변화의 연속에 있다 보면 내일도 오늘처럼 맑기를 바라지만 내가 바랐든 말든 하늘은 그리고 사월은 제 내키는 대로 하고 말 것이라는 걸 알게 되지.

의역하면 사월은 제멋대로 정도가 아닐까? 바람은 휩쓸고 잔디를 울렁이고 옷자락은 너불거리는 그런 시기. 아주 마음대로 구는 버르장머리 없는 날씨…


너에게는 솔직히 써도 되겠지?

이런 날씨엔 마음이 심란해져. 나는 뜬금없이 올 한 해를 암스테르담에서 보내기로 했고 아주 즐겁고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러던 와중에 불쑥 걱정이 찾아오곤 했어. 이제 슈퍼마켓에서 결제는 어떻게 하는지, 트램은 어떻게 타는지, 강의실은 어떻게 찾아가는지… 같은 가벼운 유의 ‘어떻게’를 묻는 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일까?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좇을 것인지, 누구를 사랑할 것인지, 그리고 따라오는 언제, 어디서, 왜… 이런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



매주 가는 공원에 또 가서,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하고, 메모장을 펼치고, 지금 도대체 무엇이 삶의 문제로 자리하는지를 줄줄이 적었어. 무엇이든 적으면 별거 아닌 게 되니까. 그렇게 한참 쓰는데… 바로 옆 테이블 위로부터 펼쳐진 천막이 쿵 하고 부서지듯 내려앉았다. 다행히 절반만 그렇게 돼서 천이 아래 있던 사람 머리에 아주 가까워지기만 하고 문제는 없었지만, 그걸 보고 있으니, 고민의 끈도 끊겨서 노트북을 접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어.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을 본 적이 있니? 프랑스 출신의 감독인데, 바캉스로 떠난 남부 파리이든 일하고 머무는 파리든 영화 배경으로 삼아진 프랑스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따뜻해. 그의 영화 대부분을 이루는 대화 장면은 시답잖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분명 어떤 심지가 있어서 마음에 위안을 주곤 했어. (영화를 보고 싶다면 여기서 편지를 접어두고 보고 돌아와 읽어도 되겠다…)

아무튼, <녹색 광선>은 이런 이야기야. 영화는 델핀의 썩 유쾌하지 않은 여름 바캉스를 그려내. 주인공 델핀은 조금 예민하고 유약한 면이 있는 파리지앵인데, 타로나 별자리, 행운의 색깔(초록!) 같은 미신에 의지하고, 길거리에서 하트 킹 카드를 줍고는 운명의 사랑을 만나게 되리라 생각하게 되지만, 또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혼자 울기도 하는… 찌질하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유형의 친구 같은 사람이야. 그러다 중년의 여자들이 모여하던 녹색 광선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돼. 그리고 녹색은 델핀에게 행운의 색이지. 델핀은 그걸 꼭 보고 싶다는 집념을 갖게 돼.



녹색 광선은 해가 뜨기, 혹은 지기 직전에 그 수평선 근처에 녹색 광선이 아주 잠깐 비치는 현상인데, 여자들은 그 빛을 보면 함께 있는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미신을 말해. 운명적인 사랑을 찾지만, 막상 다가오는 사람에는 뒷걸음질 치던 델핀은 끝에서 한 남자와 노을을 보고, 그러다 녹색 광선을 보고, 그리고 영화는 끝나.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사람은 델핀을 성가셔할 수도 있고 공감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델핀의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아주 잘 알아. 불쾌하지도, 나쁘지도, 그렇다고 화나지도 않지만, 감정이 꼭 물속에 잠겼다가 꺼내져서 아래로 축 끌어당겨지는 그런 느낌. 이번 주 내내 나는 그런 유쾌하지 않음의 상태에 있었고 주의 마지막 일요일에 나는 평생을 기억할 노을을 봤어.



우연히 친해진 L과 영화 한 편을 봤는데, 선뜻 네덜란드에서 날씨가 좋은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암스테르담에 있으니까, 바다에 가보면 어떻겠냐 물어왔고 날은 잠깐 흐려졌다가 금방 개서 하늘은 새털구름이 가득했어. 그리고 해가 졌고 나는 녹색 광선을 얘기했지만, 그것을 보진 못했다. 대신 수평선 위가 구름 때문에 요상하게도 초록이었고 또 L의 눈동자도 초록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뭐라도 초록인 걸 봤으니 됐다고 하고 해가 다 저물 때까지 모래에 서 있다가 돌아왔어.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으니 해변에서부터 따라온 모래가 한 움큼! 우연처럼 따라온 기념품을 쓰레기통에 털어내면서 나는 한결 유쾌해졌어.


줄줄이 하고 싶은 말만 했네.

정리하면 이래.

사월은 버르장머리가 없고 나는 네가 <녹색 광선>을 봤으면 좋겠다는 것.

나의 행운의 색도 초록이고(내 마음대로 정했어) 그 무너진 천막 사이로 초록 나뭇잎이 날아와 내 노트북에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조금 더 유쾌한 날을 보냈으면 한다는 것.


다시 편지할게.


추신.
너는 델핀을 성가셔할 사람이니 혹은 비슷하다고 느낄 사람이니?
운명을 믿니? (나는 운명보다는 우연주의자야)
유쾌하지 않은 마음일 때 너는 어떻게 하니?


2024년 4월 8일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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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3 - 2024 APR 8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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