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에서 옷을 떠올리다
_ 에게
너는 모쪼록 날씨에 관하여 좋은 말만 했길 바라.
말이 씨가 된다더니 사월이 제멋대로라고 해서인지 낮에 태풍처럼 비가 내렸거든.
잠깐 비가 그쳤을 때를 노려 텅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슈퍼마켓에 다녀왔어. 아직도 밖은 밝다.
지난 목요일부터는 어제까지 나는 코펜하겐에 있었어. 암스테르담에서보다 센 바람을 만나리라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사방으로 나를 밀어내는 바람 속을 걷느라 피로가 쌓였는지 돌아온 저녁에 금방 곯아떨어졌어.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열감이 오르고 코는 맹맹해진 거 있지. 여행은 어땠냐고 만나는 플랫 메이트들이 물어올 때마다 꽉 막힌 목소리로 좋았다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신뢰 가는 답은 아니었겠지.
그렇지만, 코펜하겐은 정말 좋았어. 아주 잘 차려진 도시였거든. 사람들은 죄다 사진을 찍어 두고 싶을 정도로 근사하게 입고 있었고, 공간들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정돈되어 있었어. 매년 두 번의 패션위크가 열린다는 이 도시는 아방가르드한 것부터 실용적인 것까지 아우르는 어떤 포용감의 인상을 줬어. 그리고 무언가를 꾸미고 차리는 과정에서의 고민이 이어진다는 점이 좋았다. 이르자면 디자인에 꾸미기 위함 그 이상의 의미를 붙인다든지, 옷에 금방 입고 버리는 유행의 껍질을 벗겨낸다든지, 그래서 삶에 활력과 지속을 불어넣는 길을 찾는다든지…
너한테 옷은 어떤 의미니? 아마 너도 알겠지만… 나는 차려입는 것에 신경을 아주아주 많이 써. 그게 꼭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는 아니야. 물론 어느 때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차려입을 때도 있었지만서도… 나에게 옷은 아주 근접한 기억 행위 중 하나야. 어떤 옷을 입을 때면 그 옷에 따라붙는 온갖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샀지만 어떤 건 아주 오랜 역사가 따라붙기도 해.
삼 년째 끼고 다니는 은반지는 J 양과 오래전 꼼지락대며 직접 만든 것이고, 데님 원단으로 만들어진 가방은 몇 년 전 여름 베를린에서 샀던 것이고, (한국의 이십 대 여성이라면 하나쯤은 갖고 있을 법한) 아주 흔한 긴팔 티는 이상하게도 첫 데이트 같은 걸 하게 될 때마다 입었던 것. 이렇게 살 때부터 기억은 자꾸 옷에 쌓여서 입을 때면 먼지가 털어지듯 후드득 머리에 내려앉는다.
이번 여행 가기 전에 하루 종일 가서 무엇을 입을지 고르느라 골머리를 앓았어. 어떤 기억을 꺼내 올리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모두가 잘 차려입는다는 도시에서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있기 싫다는 저항감에서였지. 옷장을 비웠다가 채우고 조합을 맞춰 보기를 반복하다가 지쳐서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고… 어찌저찌 옷을 골라 입었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해야겠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일상의 것을 차리는 데에 집착적인가 봐. 옷도 음식도 집도 사소한 것에부터 일일이 풍선처럼 의미를 불어넣으려고 들어. 누군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여자와 대화를 하다가, 상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귀여운 일 중 하나가 네일아트인 거 같다고, 어쩜 꾸미는 데에도 끝이 없어서 그 작은 손톱까지 꾸밀 수 있겠냐고 말해왔던 게 기억이 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지만 충만하게 부풀어 있는 의미의 풍선. 나만 알아봐도 기분이 좋고 누군가 알아 봐준다는 건 나의 아주 작은 구석까지도 들여다보려고 하는 남을 만났다는 뜻! 그래서 나는 가까운 사람의 꾸며진 손톱을 꼭 언급하려 들어. 그리고 나의 알갱이처럼 작은 풍선들을 알아채 오는 남을 만날 때면 무척이나 기쁘다.
여행지에서 사 오는 기념품이 아마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풍선 중 하나이지 않으려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책과 사랑을 가사로 삼는 민요의 필사본을 표지로 하는 엽서를 샀고, 안데르센이 동화를 쓴 도시에서 거북이 반지를 샀어. 코펜하겐의 운하에 가서 벽에 걸터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당장 반지 위의 거북이가 꼬물거려 달아나 운하로 돌아가 헤엄쳐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하더라도 나는 흔적만 남은 반지 링을 꼈을 거야. 반지의 빈 자리를, 바다로 도망간 그 은색의 거북이를 생각하면서, 누군가 왜 펜던트 받침대만 남은 반지를 꼈냐고 물어오기 전까지 기억의 풍선을 나 혼자서 꼭 끌어안고서.
너에게 편지를 다 써가니 갑자기 해가 찌기 시작해.
묵은 먼지가 쌓이기 전에 청소해야겠어.
곧 즐거운 손님이 오거든.
들뜬 마음으로 다음 편지를 쓰게 되겠다.
풍선이 많아지는 한 주가 되기를!
추신.
옷장에서 가장 의미 깊은 옷이 무엇이니?
여행에 갈 때면 꼭 수집해 오는 게 있니? (나는 엽서를 사 모은다)
2024년 4월 15일
암스테르담에서
아주 차려 입은 마음으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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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3 - 2024 APR 15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