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키메라>, 우리는 늘 과거를 약탈한다
_ 에게
안녕, 다시 한 주의 시작이다.
퉁퉁 부은 느낌으로 아침을 맞았어.
늦게 잠들었고 그래서 느지막이 일어났거든.
넌 개운하게 하루를 맞이했기를!
지난주 너에게 말했었지? 즐거운 손님이 온다고.
J가 암스테르담에 찾아왔어. 이상하게도 내 주변에는 이니셜이 J인 사람들이 많아서 온갖 J를 네게 얘기했던 것 같지만, J들이 내 삶에 나타난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자면 이번 J는 맨 앞쯤에 있는 여자라고나 할까.
나에게 있어 J는 서울만큼 알고 지낸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서울에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스물 무렵에 만난 이들과 쌓은 시간은 곧 서울의 시간과 꼭 붙어 있어. 도시를 알아간 시간만큼 나에게 체류한 사람들. J를 만나자 도시가 째로 내게 배달되어 온 기분이었어.
목요일에 느닷없이 찾아온 J는 일요일이 찾아오는 자정에 떠났고, 나는 이사를 앞두고 텅 빈 집처럼 적적한 마음이야.
J가 오기 전부터 제법 들떠서 실컷 계획을 짜고 온갖 잡다한 것들을 사서 환영할 준비를 했어. 트램에서 내리는 J를 보자 기분이 아주 이상했지. 2년 전 여름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던 K와 S가 떠오르기도 했어. 이렇게나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너무나 친숙한 얼굴들. 그들의 얼굴에는 함께 아는 도시 서울이 있었고, 그런 동시에 각자 알았던 도시가 있었고, 이제는 새로운 도시가 한 겹 더 쌓아 올려졌지.
암스테르담에 일 년 있기로 한 이상 이제 몇몇은 서울보다 오래 알고 지낸 셈이 될 텐데, J가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이 도시를 나와 나눌 수 있어 기뻤어. 나와 J는 늘 만나면 의식처럼 했던 것들-영화를 보고 피자를 먹고 농담을 하기-을 차례로 행했고, 의도나 우연 아래에서 올해 일월 암스테르담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에 갔던 곳들을 순례하듯 다시 방문하게 됐어. 분명 현지인 맛집이라 했는데 어느새 관광객으로 들어차 버린 더치 팬케이크 가게, 온갖 희한한 물건을 모아 파는 잡화점, 뜬금없이 중앙에서 재즈 공연이 펼쳐지던 도서관. 성큼성큼 발자국을 남기면서 도시를 순회했다.
있지, 마지막 날 우리는 영화를 한 편 봤어. <키메라>라는 이탈리아 영환데 말이지, 작년 영화제에서부터 보고 싶었는데 예매에 실패하고, 공식적으로는 얼마 전 개봉을 한지라, 네덜란드어 자막을 다는 이곳에서 그 영화를 보기는 글렀다 싶어 포기한 지 오래였어. 그런데 이번에 둘이 영화를 알아보다 어느 박물관 같은 곳에서 그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틀어준다는 걸 알게 돼 급하게 예매했지. 영화를 보기 위해 페리를 타고 암스테르담 북쪽으로 건너갔어. 여기서 영어 자막은 흔치 않아서인지 영화 시작 전 상영관에서는 온갖 외국어가 혼재되어 들려왔다. 이 도시를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수두룩했을 거야.
영화는 고고학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도굴꾼에 관한 이야기였어. 작년에서부턴가 좋아했던 조시 오코너가 주연 아르투(Authur를 이탈리어로는 이렇게 읽더라)를 맡았어. 토스카나 지방의 유일한 외국인-그래서 English man이 별명인- 남자. 어떤 영화라고 딱 잘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대충은 이런 얘기야. 도굴이 아주 성행하던 1980년대 이탈리아. 아르투는 땅속 유물을 감지할 수 있는 일종의 초능력이 있고, 대개 그 유물은 무덤 속에 있어서, 아르투와 그의 친구들은 땅을 파고 무덤을 파헤쳐 죽은 자와 함께 묻힌 매장품을 꺼내다 팔아. 환영이나 꿈이 중간중간 아르투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나는 조시 오코너의 아주 예민하고도 유약한 연기를 좋아하는데, 여기서도 그런 연기를 볼 수 있어 즐거웠어. 장면이며 이야기며 할 말이 산더미 같지만 그건 편지가 아니게 되겠지.
영화를 보고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어. 과거는 언제나 약자라는 것.
현재는 늘 과거를 약탈해 오는구나 싶다.
무덤은 산 자를 위한 것은 아니고, 죽은 자를 위한 것 혹은 내세의 신을 위한 것이지. 영화에는 늘 에트루리아 유물이 나오는데, 당연히 영화가 이탈리아 북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겠지만, 더 나아가면 그들은 현세보다 내세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땅 아래 묻었기 때문이야. 다시 열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과거가 현재에 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은 땅 아래 묻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그게 전부지. 누군가 삽으로 땅을 파헤치고 쇠 지렛대로 뚜껑을 열면 무산되는 일. 영화에서 아주 커다란 무덤이 열렸을 때 그 순간 벽화가 공기를 만나면서 산화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서글펐다. 아르투의 친구는 그 안의 여신 동상을 보고 “그녀는 이곳에서 우리를 이천 년간 기다린 거야!”하고 신 난 마음을 감추지 못하지만, 아르투는 그 동상 앞에 서서 한참 그녀의 눈을 바라보거든. 그게 참 슬펐어.
이번 주 J와 지내면서 나는 아주 많은 과거를 약탈했어. 잠겨 있던 것을 뒤엎고 꺼내고 쓰고 말하고. 사월 말에 나는 또 한 주의 휴가가 있고 그때 폴란드에서 J를 다시 만나 여행을 하겠지만, J가 떠날 때는 아쉬운 마음에 떼라도 쓸 뻔했다. 약탈한 과거를 다시 잠재우느라 진이 빠져 오늘 느지막이 일어난 것일지도 몰라.
내내 좋지 않던 날씨는 J가 떠난 날부터 갑자기 맑아져서 오늘까지도 해가 쨍하게 떠 있네. 그래도 집어넣은 코트를 도로 꺼낼 정도로 쌀쌀맞은 기온은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월까지는 <키메라>가 극장에 걸려 있지 않을까. 꼭 봄의 몽상 같은 영화라서 봐도 좋겠어. 그럼 물구나무를 선 인간을 닮은 나무를 곳곳에서 보게 될 거야.
안녕.
이건 에트루니아 어느 무덤에 그려져 있던 그림.
그들에게 장례는 기쁨 섞인 애도의 시간이었대.
<무희들>, 트리클리니움의 묘, 기원전 470년경
추신.
다시 약탈해 오고 싶은 과거가 있니?
공간에 담긴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니?
2024년 4월 22일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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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3 - 2024 APR 22nd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