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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5. 오렌지

네덜란드 킹스데이 체험기

by 가을

_ 에게


사월이 그새 다 갔다.

제멋대로이던 날씨는 킹스데이가 지나고 나면 괜찮아진다더니 오늘 일어나 보니 정말이지 여름이 성큼 와 있네. 올여름은 후덥지근하고 눅눅하기보다는 산뜻하고 쾌청하지 싶다.



볕이 든 날에는 낮에도 사람들의 실루엣이 선해서 좋아.


이번 주에도 손님을 맞이했어. 사실 암스테르담도 한가득 손님을 맞이했지.

나도 이곳에 오고서 안 건데, 네덜란드에도 왕이 있거든.

그리고 매년 왕의 생일날을 기념하는 킹스데이가 있어. 아주 큰 연휴야.

카니발처럼 길거리엔 음악이 울리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행진을 해.

그리고 나라 전체가 오렌지빛으로 물들지.



네덜란드 역사 수업을 듣다가 알게 된 건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공을 세운 영웅이 있었고… 그 인물이 국왕 격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Willem van Oranje 여서… 그러니까 왕가의 성이 정말 오렌지라서… 국색도 오렌지가 되었다는 웃기고 귀여운 이야기. 여왕이 양위를 하기 전까지는 퀸즈데이였고, 아들인 지금의 왕이 즉위를 하면서 킹스데이로 바뀌었는데, 20세기에는 퀸이었나 킹이었나 생일이 일월이어서 한겨울에 축하하느라 힘들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목요일날 Y가 도착했고 가볍게 동네를 소개해 줬다. 이미 도시는 오렌지로 물들 준비하고 있었어. 그에 지지 않기 위해서 냉장고 안에 잠시 넣어 놨던 오렌지를 그날 밤 까먹었어. 아주 새콤한 맛이었어. 다음날은 튤립을 실컷 봤고, 남은 오렌지 하나를 마저 먹었어.



그리고 토요일! 이날에는 오렌지색이 든 옷이 뭐든 하나 입어야 하는데, 암스테르담에 오기로 결정되면서 진작에 언젠가 오렌지색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걸 알았던 나는 어느 빈티지 옷 가게에서 오렌지색 체크 셔츠를 샀었고, 바야흐로 일 년이 지나고 그걸 입을 때가 찾아왔단 걸 알았어. 이방인인 나는 남의 나라 왕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로 결심했고, 이방인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섰어. 손님 Y는 지금 파리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고 있었으니까 암스테르담에 관하여서는 나보다 더 이방인인 셈이지. 관광객보다는 덜 들뜬 척하려고 애썼지만 다들 평소보다 신나 있었어.

창가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는 사람들, 보트에 타서 손을 마구 휘적거리며 인사하는 사람들, 어디서 났는지 무척 큰 스피커를 집 앞에 두고 음악을 트는 사람들, 그리고 공원 속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아이들, 직접 만든 컵케이크를 파는 아이들, 또 오렌지 목줄을 찬 강아지들, 떨어지는 부스럼을 주워 먹는 새들, 아주 인적이 드문 데에서나 보이는 고양이들, 더해서 서로를 잃어버려도 금방 깃발을 흔들면서 찾아내는 익숙한 오렌지 모자를 쓴 뒤통수, 볼을 맞대며 사진을 찍어오는 친숙한 볼, 서울을 떠올리는 모국어를 쓰는 목소리.

이런 것들이 섞여서 맥주를 연거푸 마셔서 음악이 무척 커서 꼭 꿈처럼 기분 좋게 산만했어. 인파를 뚫고 겨우 돌아온 우리 동네는 아주 고요했어. 새가 가끔 재잘거릴 뿐이었지. 우리는 저녁에 마실 와인이며 치즈며 온갖 것들을 기념품처럼 손에 거머쥐고 집으로 돌아갔어.


Y가 네덜란드는 이상하리만큼 평평해서 가짜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라고 했어. 반복되고 정돈되고 또 끝없이 펼쳐질 것처럼 평탄하다고. 자꾸만 드는 기시감으로 네덜란드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했어. 그렇다면 나는 하필이면 색에 맛도 향도 덧붙어 있는 나라에 와버려서, 나는 아주 새큼한 향을 맡으면 이곳을 떠올리지 싶어. 잘된 일이려나? 이때가 그리우면 냉장고에 넣어 둔 오렌지 하나를 까먹으면 되니까.


오늘 저녁에 폴란드에 가.

네게 말했었는데, 지난주의 손님이었던 J 기억하지?

또 그곳에서 만나는데, 둘 다 계획은 없고 뭘 먹을지 궁리 중이야.


시간을 누가 한 조각씩 쏙 빼다 먹은 건지 금방 날아가 버려서 벌써 오월이고 여름은 문 앞에 있네.

새로운 달을 맞이하며 아주 새큼한 과일 하나를 베어 먹어도 좋을 거야.

여행을 다녀와서 편지할게, 탈 없이 지내렴.


추신.
네가 지나쳐 온 도시 중에 아주아주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상징이 있니?


2024년 4월 29일

암스테르담에서

시트론 향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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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3 - 2024 APR 29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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