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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 아주 초록의

오월 초 폴란드 여행기

by 가을

_ 에게



안녕, 잘 지냈니?

지난주 또 여행을 다녀왔어

초여름처럼 쨍하고 맑았던 폴란드

바르샤바는 곳곳에 인어가 놓여 있고

크라쿠프는 아직도 용을 믿지

두 도시는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해서

초록이 아닌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뙤약볕 아래에 서서 바람을 기다렸고

그런 기다림은 사소해서 즐겁지

너도 풀내음을 맡고 있니?

수군대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니?


2024.05.04.

Moc pozdrowień od 가을

Z Polski.



녹음이 짙어 와.

사람들은 이제 살을 드러내는데 나무들은 옷을 두터이 입기 시작해.

차양처럼 펼쳐진 나뭇잎 아래는 참 서늘하다.


서울만큼 알고 지낸 J를 지난주 폴란드에서 재회했어. 네게 얘기했었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서울에 살기 시작해서, 스물 무렵에 만난 이들은 내가 도시를 알아간 시간만큼 나에게 체류한 사람들이라고. J도 그중 하나인데, 지난달 암스테르담에 찾아와 만난 이후로 벨기에와 파리를 떠돌았고, 난 그사이 한두 명의 손님을 더 맞았고, 그러다 지난주 폴란드에서 다시 재회했어.



너는 여행에서 어떤 걸 기대하니? 나는 어느 도시로 향하든 얼마나 그곳에 머무르든 간에 현지의 감각을 얄팍하게라도 그러쥐려고 하는데, 이르자면 영어가 당연하지 않은 가게에 간다든지, 공원에 널찍이 드러누워 산책하는 강아지와 인사를 한다든지, 도서관에 들어가 한참 앉아 있다든지, 이런 것들-당연하고 친숙한 일상의 굴레에 있는-을 얘기할 수가 있겠다. 이웃과 동네 틈바구니에 껴들면 이방인의 정체성은 아주 옅어져서 종종 그 나라 말로 대뜸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혹은 아주 진해져서 길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어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하지. 여행보다는 임시 거주라고나 할까.

폴란드는 모두가 꼭 가겠다고 마음먹는 여행지는 아닌지라, 이리저리 검색하다 자칫하면 2009년의 방문기를 읽게 될 만큼 정보가 많지는 않았어. 그렇지만 J도 여행에서 정처 없이 거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게다가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어느 도시든 우리의 동네처럼 느껴져서, 첫날 아주 늦은 밤에 크라쿠프에서 재회한 우리는 이미 한껏 들떴었지. 그새 쌓인 이야기가 많아서 한참 풀어놓다가 늦게 잠들었던 것도 같다.



폴란드엔 공원이 아주 많았어. 크라쿠프는 바벨 성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세로는 짧고 가로가 아주 긴 공원이 있었는데, 밤에는 산책하며 소곤대는 연인이 많았고 낮에는 걸터앉아 해를 쬐는 가족이 많았어. 그 공원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도시에 머무르는 나흘 동안 매일 그곳을 찾아갔어. 어딜 가든 그 공원을 꼭 지나쳐야 했기 때문도 있지만 말이야. 저 멀리 용이 살았다는 성을 향해 횡으로 뻗은 길을 걷는 건 참 동화 같은 일이었어. 한강처럼 또 횡으로 도시를 가르는 강변도 물기로 서늘해서 좋았고.



오슈비엥침-독일어로 읽으면 아우슈비츠-에서 목적지로 걸어가는 길에는 푸른 공터가 많았어. 한적해서 때때로 새가 퍼덕이는 소리도 잘 들렸지. 열린 창문 밖으로 보이는 드넓은 풀밭이나 그물이 없는 운동장 골대 이런 것이 참 서글펐다. 볕이 잘 드는 날이었어.



그리고 바르샤바에는 동서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두고 아주 커다란 공원이 있었어. 곳곳에 보물처럼 동상이 숨어 있어서, 북쪽엔 마리 퀴리가, 남쪽엔 쇼팽이, 또 어디엔 코페르니쿠스가, 그리고 강변엔 인어가 있었지. 첫날 퀴리 부인의 시선이 닿는 공원에는 아이들이 언덕 위를 뛰놀았고, 다음 날 도서관을 덩굴처럼 둘러싼 공원엔 외계인이 왔던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미심쩍고수 상한 녹빛 구조물이 널브러져 있었고, 마지막 날 해가 지는 무렵 지나친 작은 공원에는 중년의 부부가 서로의 어깨에 살폭 기대 책을 읽고 있었어.



빽빽한 나무와 바람에 수군대는 나뭇잎, 땅 위로 개기월식처럼 진 그림자. 이런 것들은 소박하고 단순해서 아무리 오래 머무르고 자주 간다고 하더라도 질리지 않아. 폴란드가 이백 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던 때도, 바르샤바가 일어섰다가 부서졌던 때도, 그리고 누군가 목적지 모를 기차에 올라타고 내렸던 때도 나무는 이렇게나 무성했겠지. 공원은 짐작 못 할 만큼 오래 비밀로 속살거렸을까.

짧은 여행 동안 이따금 J와 나에게 작은 소동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무사히 각자의 다음 목적지로 작별했어. 곧장 일상으로 돌아가려니 피로하지만, 눈을 감으면 숲의 소리가 들리는 듯해. 공원이 더 많아졌으면, 그리고 녹음이 더 우거져 왔으면 좋겠다.


네게도 이번 주에는 나무 사이를 거닐 시간이 찾아오기를 바라. 이만 줄일게. 안녕!


추신.
여행에서 꼭 들르는 장소가 있다면?
무척 좋아하는 공원 하나를 꼽는다면?


2024년 5월 6일

암스테르담에서

풀내음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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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4 - 2024 MAY 6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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