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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 슬픔 쓰기

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날

by 가을

_ 에게


안녕, 잘 지냈니?

오랜만에 손님도 여행도 없는 한 주를 보냈어.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오고 가지 않았단 얘긴 아니야.

비구름은 가고 햇볕이 몰려와서 벌써 살이 타기 시작했거든.

선크림을 단단히 바르렴.



편지를 쓰다 보면 네가 읽을 거란 생각에 지나온 날 중에 아주! 즐겁고 들떴던 혹은 아름다웠던 것들을 골라내서 얘기하게 돼. 기억은 그때의 감정에 의존하기 마련이니까, 나의 기쁨을 골라내게 된다고 할까? 하지만 잘 알다시피 일상은 늘 매끄럽지 않고 어설프고 어긋나기 마련이라서, 편지 쓰는 일은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지만, 그런 편집된 기쁨을 쓰는 게 꼭 달갑지만은 않을 때가 있어.

그러니 이번엔 푸념을 늘어볼까.


*


다리에 아주 큰 멍이 들었어.

여행에 돌아온 다음 날이었나. 오후부터 늘어지게 낮잠을 잔 날이었어. 일어나 보니 저녁이었는데도 해가 떠 있길래 이렇게까지 하루를 어영부영 보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장을 보러 나가기로 했지. 가까운 거리지만 자전거로 가면 더 가까우니까, 또 여행이며 이런저런 이유로 자전거를 탄 지도 오래됐으니까, 겸사겸사해서 주차돼 있던 자전거를 꺼냈지. 지난 여행 중에 무선 이어폰을 잃어버려서 방에 남아 있던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고 요즘 들어 잘 들지 않던 뒷바퀴 브레이크를 매만지다가 잘 모르겠다 싶어. 그냥 출발했지.


그리고… 크게 넘어졌다.


페달을 밟아 달리는데 이어폰 줄이 귀에서 빠져나와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한 마음에 대충 앞바퀴 브레이크-자전거로 넘어지는 최적의 방법-를 쥐어 잡았더니 반 바퀴 붕 뜨면서 땅으로 떨어졌어. 넘어짐이 대개 그렇듯 아픔보다도 부끄러움이 커서 다들 도와주러 오는데 괜찮다고 하면서 일어났어. 알고 보니 뒷바퀴 체인이 빠져서 그걸 다시 끼우느라 손엔 기름이 덕지덕지 묻었고 뒤늦게 받치며 넘어진 왼손이나 자전거 위로 엎어진 오른쪽 다리가 아파와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지.

한동안 손목이 부서진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금방 괜찮아져서 의심을 거뒀지만-, 이틀이 지나서야 문득 다리를 보니 검푸른 멍이 있었어. 아주 둥글고 크게 든 멍.



어렸을 때 나는 자주 부딪히고 넘어졌어. 뛰다가 걷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인라인스케이트로 달리다가 그네를 타다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온갖 상황에서 바닥에 부딪히게 될 때마다 곧장 일어나서 털고 상처를 닦고 집에 가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는데 그땐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어. 한참 놀다가 언젠가, 아마 엄마가 상태를 들여다보려 할 때, 상처는 다 나아 있었지.

고등학교 때에는 양옆에서 넘어질 뻔할 때마다 잡아주는 J나 S가 있어서 그런 일이 없었고, 스물이 넘어서는 이제 양옆엔 매일같이 나를 잡아줄 J나 S가 없다는 걸 알고 조심스러워졌는데, 그래도 크게 몇 번 넘어졌어. 발목을 크게 삐었고 종아리를 세게 부딪치고. 어릴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털고 상처를 닦는 건 같은데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지곤 했어. 나을 때까지 까먹지 않고 매일매일 얼마나 나았는지를 확인하려 들게 됐지.

왜 울적해지나 몰라. 곧 낫거나 사라질 게 분명한데. 사실 낫지도 않았는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슬퍼해야 할 일인데 말이지.



아침부터 팔십 년대 플레이리스트를 들었고 Queen과 David Bowie의 Under Pressure가 흘러나오길래 반복 재생을 걸어 뒀어. 정말 슬프고 좋은 영화 애프터썬에서 딸과 아빠가 춤을 출 때였나 나온 노랜데, 왜 우리는 한 번 더 사랑할 기회를 줄 수 없는지를 몇 번이고 되물어. 압박 아래에서 추는 마지막 춤-혹은 몸부림-… 이런 가사가 나오는데 듣고 있으면 아주 감상적인 생각에 빠지게 돼.

넘어진 뒤로는 시도 때도 없이 슬픔을 느꼈는데, 이건 내 안에서 태어난 슬픔이 아니라, 그냥 소설이나 영화를 읽고 보다가 느끼는 내 안으로 배어든 슬픔 같은 거야. 나무를 보면 슬픈데 네덜란드엔 나무가 너무 많아서 너무 자주 슬프다는 나의 말에, D 언니는 ‘한순간에 하찮은 이유로 멜랑콜리해지기!’ 정도의 웃긴 초능력으로 부르자고 해줬어. 그리고 Under Pressure를 듣는 마음도 아주 멜랑콜리하다. 멍이 나으면 이 능력도 사라지겠지. 생각하니 슬프다(이건 농담이야).


*

기쁘지 않은 이야기를 기쁘게 썼다! 크게 넘어진 뒤로 어떤 알이 깨어져 나오는 것처럼 마음속이 더 쉽게 흘러나오나 봐. 슬픔은 기쁨의 지척에 있다는데, 편지에 담긴 슬픔은 아주 기쁜 슬픔이 되는 걸까.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도 편지에 담기면 아름다워지려나. 마음을 꾹꾹 눌러써야 하는 때인가 싶어.


다음에 쓸 때는 멍이 다 빠져서 다시 또 한껏 부풀린 생각을 써 보낼지도 몰라.

그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추신.
마지막으로 넘어진 게 언제니?


2024년 5월 13일

암스테르담에서

진심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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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4 - 2024 MAY 13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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