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서 날아든 편지
_ 에게
잘 지냈지?
그새 멍이 다 빠져서 슬픔도 빠져 버렸어. 좋은 일이겠지?
요즘은 열 시가 넘어서야 하늘이 어둑해진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하루가 영원할 것처럼 느껴져. 그 말은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며 버텨야 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다는 얘기지. 어젯밤엔 서쪽으로 달이 떠서 방안으로 달빛이 훤하게 들어왔어. 밤까지 영원한 건 끔찍하니까 커튼을 닫긴 했지만 말이야.
선명하게 남은 초등학교에서의 기억 중 하나. 해 움직임 관찰 실험. 긴 나무막대를 흰 종이 위에 붙여 세워서 한 시간마다 막대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는 게 임무였지. 수업을 듣다가 누가 한 시간 지났다! 외치면 다 같이 우다다 정원으로 달려 나가 그림자를 따라 선을 휙 긋고 선생님이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종알종알 떠들었지.
아마 최초의 초등학교에서의 기억. 아직 유치원생이나 다름없는 애들을 통솔하기 위한 선생님의 방책은 눈 감고 시간 세기였어. 시작을 외치면 딱 눈을 감고 초를 세서 딱 일 분이 지났을 때 눈을 뜨는 사람이 이긴다는… 아무도 승자를 알 수 없는 게임이었지. 그때도 승부욕이 심했던 나는 나름의 비결을 깨쳤는데, 눈을 감기 직전에 시계 초침을 보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따라 세면 그 리듬이 남아서 일 분을 제법 정확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지.
우리는 시간을 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육십 초까지 헤아려 보기만 해도 사실 시, 분, 초 그 뒤에 나눠지지 않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걸 알게 돼. 현재를 과거로, 미래를 현재로 자꾸만 끌어오는 인력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지. 그러니까, 시간 헤아리기는 사실 시간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느끼는 일이라는 얘기. 적어도 나는 그래.
서울에서 내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서쪽으로 나 있어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내가 향하는 방향 저 멀리 해가 지는 걸 볼 수 있었어. 거의 맨날 그 광경을 보는데도 매일같이 멍하니 보다가 사진을 찍고는 했지. 시간도 서쪽으로 가는구나, 그래도 해가 질 무렵에 만큼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대신 내가 시간을 쫓아 서쪽으로 달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
다시 돌아와 암스테르담,
유럽의 해는 아주 느지막이 버티고 버티다 내려앉지. 그리고 내 방에는 통창이 있고, 서쪽을 향해 나 있다. 어릴 적 했던 그 실험처럼 정오가 지나면 햇빛이 서서히 방 안으로 들어와. 꺼진 채로 서 있는 기다란 조명 스탠드, 다 먹어가는 그래놀라 박스, 어디서 받아 온 작은 곰 인형, 앉은 적이 없는 검은 소파, 오래간 빈 화병, 그 옆의 외계 식물, … 조금이라도 높이가 있는 것에는 그림자가 지고 서서히 길어져서 방 전체에 드리워. 땅에 붙어사는 개미에겐 시간이 따라붙지 않을지도 몰라. 키가 크지 않지만 어쨌든 땅에 두 발 딛고 선 나에게는 아주 집요하게 따라붙는데 말이야.
넌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니?
서울에서 나는 조급했고 바빴고 정신없었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쉽게 불안해지기도 했지. 어영부영 다 흘려보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해가 지는 서쪽으로 향할 때가 아니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 이렇게 내 뒤에 성큼 다가와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고 초등학교 때 배운 사실인데, 한참 잊었던 거지.
이곳에 온 뒤로 시간과 걷는 법을 배우고 있어.
아침에 바깥이 너무 밝아 일곱 시에 눈이 떠질 때도 있어. 그럼 과일과 견과류를 넣은 요거트를 먹으면서 오늘의 날씨를 점치고, 늦장을 부리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제법 맑아 보이는 날이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또 나가서 빗물을 맞고, 공원이든 벤치든 테라스든 앉을 수 있는 데면 엉덩이를 붙여 커피를 마시고, 구경하고, 거닐고, 사람을 보고, 듣고, 양달과 응달을 번갈아 걷다가, 피로할 때 집에 돌아와 전날 만들어 두고 남은 저녁을 먹고, 또 부엌을 오가는 플랫메이트랑 갖가지 수다를 떨고, 운동을 조금 하고, 잠에 들지.
요즘은 현재적인 일로 가득해.
지금은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
여름이 오기 직전이면 다들 분주해지는 것만 같아.
시간을 시간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어떤 근육이 자라나면 좋겠다.
아주 지루하고 권태로운 날이 언젠가 오면 다시 실험하거나 눈을 감고 초를 세면 될 거야.
이만 줄일게.
안녕!
추신.
너만의 시간 보내기(혹은 죽이기) 방법이 있니?
2024년 5월 20일
암스테르담에서
순간!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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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4 - 2024 MAY 20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