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턱에서 작별
_ 에게
잘 잤니? 혹은 일어났니?
나는 아주 졸립다. 요즘은 잠에 늦게 들거든. 해가 열 시가 넘어야 지니까 모든 걸 자꾸 뒤로 미뤄두게 된달까… 오늘은 플랫메이트 J와 마지막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해서 일찍 일어나 페달을 밟았어. 학기가 끝나갈 때쯤이 되니 한두 명씩 떠나갈 때가 됐고 J는 우리 플랫에서 가장 먼저 돌아가게 됐지. 바로 내일 보스니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거든.
작별은 항상 서글픈 일이야. 한동안 하지 못할 인사를 미리 끌어모아 전해야 하는 거잖아.
나는 이별은 잘하는데 작별에는 능하질 못해서 어렸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그 순간을 질질 끌고는 했어. 초등학교 때 개인 사정으로 잠깐 쉬시게 된 담임 선생님의 마지막 날 이미 한참을 울고 집에 갔다가 또 슬퍼져서 노트에서 찢은 종이에 짧게 편지를 쓰고 학교로 다시 달려가 선생님 손에 쥐여 드리고 또 엉엉 울었던 적도 있지. 그 뒤로 조금 커서는 눈물이 나올 거 같은 마음을 담아 놨다가 집에 가면 혼자 훌쩍이는 정도의 자제력은 길렀지. 곧 앞둔 작별들은 아주 먼 미래의 인사까지 몽땅 끌어와야 할 것만 같아. E는 며칠 전부터 이렇게 모두가 떠나는 게 이상하다면서 매일 ‘sad’라는 단어를 붙여다 말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애써 못 들은 척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안 그랬으면 진작 눈물을 흘렸을 거야.
이번 주는 부슬비가 아니라 쏟아지는 비가 내렸어.
그리고 토요일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배경은 이래. 지금 다니는 학교 어느 건물에는 웬 영화관이 입점해 있는데, 얼마 전부터 거기서 자원봉사를 하기 시작했어. 지난 토요일에는 그 영화관의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연례행사가 있었고 그곳에 가보기로 결심했어. 한강의 밤섬처럼 강 한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야 했는데, 자전거를 가져오라고 하기도 했고 그게 더 빨라서 페달을 밟기 시작했지.
그리고 한 십 분쯤 아는 길을 벗어났을 때부터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 눈은 안 떠지고 길은 모르고 비는 거세지는 거야. 그러다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가게 됐는데 그 도로 아래로 한 강아지와 연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길래 나도 그래야겠다 싶어서 옆쪽에 멈춰 섰지. 장마철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헛웃음만 나왔어. 집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이미 중간 지점을 약간 넘어섰기도 하고 오기도 생겨서 그냥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마음먹었어. 비는 멈출 기색이 없었고 약간 잦아든 틈을 타서 다시 자전거를 탔어. 알고 보니 내가 가려던 방향이 비구름이랑 같아서 가는 동안 비를 피하기는커녕 그걸 따라다니는 셈이 됐고, 온몸이 생쥐처럼 쫄딱 젖어서 수영장에서 놀다 온 애처럼 됐지만, 꿋꿋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이제 더치가 되어가는구나…-하고 뿌듯해했어.
그리고 겨우겨우 도착! 했더니 웬 다른 지점에서 일하는 중년(혹은 노년)의 더치인이 한가득이었고 몇몇 내 또래도 죄다 네덜란드어로만 말하고 있었지. 종종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니. 나는 이곳에 전혀 속하지 않는구나, 뭐 이런…. 이미 옷과 공기도 습하기는 충분했는데 마음도 습해져 와서 쩍 도망갈까 싶었어.
그러다 인사를 나눈 남자와 대화를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몇 년 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왔었다는 거야. 둘 다 신나서 한참 얘기했어. 그러다가 옆에 있던 할아버지는 자꾸 내게 -너 알아들었니? -아니요(ㅠㅠ) 의 심문 절차를 거쳐 영어로 통역해 주셨고, 옆 아주머니는 귓속말로 통역을 해주시곤 했어. 어떤 -중년이 아닌 젊은- 남자는 내가 포크를 쥐어 잡은 폼이 참 엘레강스하다는 이상한 칭찬을 했고 끝에는 데이트 신청을 해 왔다(만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이런 해프닝은 항상 즐거운 일이야). 도시 외곽을 자전거로 다 같이 쏘다니는 일은 정말 네덜란드 같은 일이기도 해서 젖은 옷이 마르면서 축축한 마음도 맑아졌어.
비가 오는 날이면 발목 부근이 젖은 양말로 하루 종일 물웅덩이를 피해 걸었고 현관 앞에 우산을 펼쳐 놓고 집으로 들이닥치면 엄마가 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제비를 만들고 있었지. 강아지를 껴안고 괴롭히다가 부엌으로 가 옆에 껴들어서 반죽 뜯기를 돕기도 했고 내키지 않으면 씻고 나와 개운한 마음으로 저녁을 기다리고는 했지.
여기서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걷고 비가 올지 안 올지를 점쳐. 하늘이 하얗고 흐리면 무조건 비가 오는데 그러면 일단 부엌에서 플랫메이트를 만나 날씨 불평을 늘어놓지. 그러다 어찌 됐든 밖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고 빗속을 달려. 오래 페달을 밟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빗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그러면 비를 맞는 순간이 썩 나쁘지 않게 느껴져.
무엇보다도 나는 비가 그치고 나면 오는 맑은 하늘을 알지. 비유가 어그러진 거 같지만 집에 오면 있던 수제비처럼 말이야. 쾌청한 날의 암스테르담은 무척이나 근사해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 채 오 분이 되기도 전에 멈춰 서서 풍경을 구경하고 또다시 타고 멈추고 타고 멈추고, 를 반복하지.
오늘은 J를 보는 마지막 저녁이고 마음은 울적하지만 비는 안 왔어. 내일은 비가 내리고 우리는 트램 정거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어. 비가 오는 날마다 불평을 늘어놓을 사람 하나가 떠난다는 게 참 서글프다.
더 많은 작별이 찾아오는 요즘이야.
오월도 작별이네.
우리가 끌어다 인사할 미래는 그렇게 길지 않기를!
여름의 문턱에서 다시 편지하자.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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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4 - 2024 MAY 27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