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습한 날 돌연 듯 찾아온 작년 여름
_ 에게
잘 지냈니?
유월이라 하면 덜컥 더울 줄 알았는데, 서안 해양성 기후에서는 여름도 서늘한 것인지 암스테르담은 아직 반팔을 입기엔 춥다. 어젠 해가 들었는데 그것도 잠깐이었어. 덕분에 옷장에서 거둬 놨던 겉옷들도 속속들이 복귀 중. 과장을 보태서 패딩을 입어도되겠다, 생각했는데 태국에서 온 Z는 이미 패딩을 입고 있더라.
너에게 얘기한 적이 있나?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으레 다들 가족 중에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겨울도 있냐고 물어오는데 말이지, 그러면 나는 꼭 기대에 부응하듯이 그렇다고 대답해. 더 정확히 하면 우리 집에는 여름만 없어서 찾는 중이라고, 나는 가을이고 동생은 봄이고 강아지는 겨울이라고 대답하지. 그럼 대개 여름을 찾으라고 하거나 여름을 자처하는데, 난 후자를 더반기곤 해. 웃기지만 따뜻한 마음이지 않니?
사실 여름은 따뜻함이란 감각을 한동안 깜빡 잊게 하는 계절이거든.
한국의 여름은 바깥은 후덥지근하고 안은 춥다고 할 만큼 시원하지.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여름이면 대구에 내려갔어. 친척들이모두 그곳에 있거든.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웠고, 특히 지구 모든 곳이 끓는 지금에 비해서는 그 더움의 차이가 훨씬 심했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찜통처럼 데워진 공기가 느껴졌고 바람이 불면 선선하긴 한데 또 한편으론 열감이 느껴지기도 했어. 그래도 할머니 댁 거실 한복판에 깔린 대나무 자리 위에 배를 대고 누워있으면, 할머니가 자꾸 수박이나 자두나 그런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셨고, 한입 베어 물면 안에 있던 과즙이 줄줄 새 꼴은 엉망이었지만, 보리차로 함께 목을 축이면, 몸 안이 가득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지.
대학에 오고 나서 첫 여름은 영화관에서, 둘째 여름은 유럽에서, 그리고 셋째 여름은 물과 풀… 그리고 도서관에서 보냈다. 열을식히기 위해 선풍기 바람을 쐬거나 안되면 찬물로 씻거나 그랬고, 꼭 오래 켜 둔 컴퓨터 본체를 식히듯이 낮잠을 오래 잤어. 아주오랜 낮잠. 둘째 여름의 정점은 로마였는데, 해가 지지를 않고 강하게 내리쬐는 바람에 나와 동행한 J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대고 아침에 잠깐 구경했다가 숙소로 돌아가 낮잠을 퍼질러 자고 해가 다 진 밤에 굶주린 배를 붙잡고 스멀스멀 걸어 나와 마저구경했어.
그리고 대학에서의 네 번째 여름은 암스테르담에서 맞이하게 됐네. 이상하게도 4월의 화창한 날보다도 추워졌어. 아직도 저녁엔 10도 가까이 내려가서 겉옷을 안 입고 나간 날 큰 후회를 했고, 지금도 긴 팔 긴 바지로 싸매고 있다. 여름의 시작이 이렇게나서늘한 덕에 아직 난 따뜻함의 감각을 찾아다니는 중이야. 건조기에서 꺼내든 빨랫감의 훈훈한 온기를 더 끌어안고, 아직도 커피는 뜨거운 거로만 주문하고, 끔찍한 맛의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는 바깥에 나가면 이제 춥진 않겠다고 얘기하고.
여름은 너무 축축하고 더워서 그 누구와도 살갗이 닿기 싫은 계절이었는데, 지난주에 집으로 돌아가는 J를 기차역에 배웅하며 일고여덟이서 꼭 안았고, 또 어제는 다들 학기의 끝을 떠올리면서 남은 우리끼리 포옹을 반복했어. 엊그젠 근교 도시에서 열리는프라이드에 다녀왔는데 날이 너무 서늘했던 바람에 감기 기운을 얻어왔고, 몸이 안 좋단 말에 E와 H는 또 가볍게 안아줬다. 기온이 체온처럼 높아지면 아주 끔찍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둘러싸이는 여름도 나쁘진 않겠구나 싶어.
너는 어떤 여름을 날 준비를 하고 있니?
잘 썰린 계란과 오이, 무가 얹힌 냉면을 먹고 싶다! 더워지면 해 먹어보려고. 슈퍼마켓에서 파는 수박도 사기를 미루고 있어. 아직 두터운 이불을 집어넣기에 바깥은 서늘하다.
이번 주 주말엔 런던에 홀로 가는데 여전히 날은 서늘할 전망.
아주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겠다.
편지할게. 무탈하렴!
2024년 6월 3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매를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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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5 - 2024 JUN 3rd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