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잘 지냈지?
짧은 여행은 기억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날아버리고는 해서, 런던에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희끄무레한 감상들만 남아 있네. 그렇지만 또 런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아주 최근의 도시에 대하여!
대도시라면 꼭 가지고 있는 요소들. 먼저 재재바른 발걸음이 있고, 웅성거리는 고독이 있고, 또 오래간 퇴적된 시간이 있지.
이런 도시들은 역사가 하나의 직선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하나의 면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게 해. 왕족이 살고 있는(살았던) 온갖 궁전이며 별관이며 그런 공간이 도시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것도 그렇고, 기대 없이 들어간 아무 식당이 나보다도 오래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넓은 면적의 시간이 공간을 둘러싸고 있지. 대도시는 그 퇴적층이 아주 두터워서 발을 잠깐만 담가도 진흙처럼 딸려 오는 질척거리는 무언가로 꾸려져 있어. 포용하는 시간이 너무나 넓어서 아주 작은 점으로 존재하는 나도 쉽게 편입할 수 있는 것만 같달까!
그래 지난주에 살아있는 록스타를 보고 오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니? 올해는 밴드 Oasis의 첫 앨범이었던 Definitely Maybe가 딱 30주년을 마주하는 해인데, 밴드는 해체됐지만(형이랑 동생이랑 싸웠고 둘은 각자 밴드를 하는 중이야), 동생 Liam Gallagher는 이번 여름 동안 30주년 기념 투어를 돌고, 지난주 런던에서 열린 공연을 내가 다녀온 거지. 물론 밴드는 맨체스터에서 생겼지만, 음악은 도시를 뛰어넘는 규모로 퍼지기 마련이니까 같은 나라에서 열리는 공연이라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하긴 충분했다.
이미 콘서트장 앞에는 온갖 나이대의 사람들이 있었다. 내 나이 또래나 그 아래도 있었지만 옛날옛적에 샀을 것만 같은 티셔츠를 입은 중년도 많았어. 맥주를 한 잔 들고 다니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옆엔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앉았어. 아마 앨범이 나왔을 때 아버지가 딱 아들 나이였을 법한 나이 차로 보였지. 30분 전부터 공연장은 2024부터 1994로 향하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는데, 시간을 거슬러 1994년에 도착하고 연주가 시작되자 아직도 건들거리는 (살아있는!) 록스타가 무대 위로 더벅더벅 걸어 올라 Rock ‘n’ Roll Star를 시작으로 30년 전의 노래를 불렀지. 옆자리 부자는 목이 쉴 것처럼 따라 불렀고 중간중간 둘이 부둥켜 어깨를 감싸 안기도 했어.
너와 나는 영원히 살지도 모르고, 네가 차 한 잔 하러 와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나는 너에게 라자냐를 대접할 것이고, 또 어릴 때 가졌던 꿈은 살아가는 동안에 다 옅어졌지만, 너와 나는 어디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이런 노래 가사를 내지르는 눈앞(꽤나 먼) 록스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했는데, 다들 옛날 혹은 오늘에 젖어있다가도 공연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하기에 나도 벅참을 접어두고 허둥지둥 길을 나섰어. 그래도 도시 안에서 간직할 멜로디가 있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란 인상은 접어둘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자랐던 도시에 함께 가면 둘은 어쩐지 평소보다 신나서 여긴 어땠고 저긴 어땠고 하는 옛날얘기를 시작하는데, 이런 대도시에는 그런 사소하지만, 질긴 기억이 얼마나 따라붙어 있을지를 상상했어. 번화가 중심에 당당하게 있는 마녀를 위한 주술서를 파는 수상한 점성술 가게는, 아무리 이상하고 모나도 티가 나지 않는 몽돌 해변의 자갈처럼, 아무렇지 않게 도시에 스며 있었지. 이번 이후로는 다시 런던에 갈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어쩐지 돌고 돌아 다시 찾게 될 것만 같아.
도시에 말 주머니를 두고 온 건지 실컷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 이제야 겨우 편지를 썼다. 런던을 다녀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내일이면 다시 짐을 챙겨 아주 남쪽으로 달아나야 해. 그래도 피로에 젖어 발이 무겁기보단 햇빛으로 바싹 말라 발바닥이 뜨거운 듯 가벼운 여정이 되면 좋겠다. 한여름에 미리 당도해서 편지할게. 안녕.
추신.
네가 좋아하는 도시는 어떤 곳이니?
2024년 6월 17일
간만에 맑은 암스테르담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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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5 - 2024 JUN 17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