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왜 12월만 되면 다들 초연해지는 것만 같은지.
벌써 한 해가 다 갔다는 둥 얘기하면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다가 자정이 넘어 종이든 폭죽이든 환영의 소리가 울리면 이번 해도 잘 지내보자고 두런두런 얘기하다 까무룩 잠에 들지. 어렸을 때 네이버에 실시간 검색어가 남아있던 때에는 ‘올해 무슨 띠’ 같은 단어가 눈에 띄었는데, 나는 꼭 그걸 눌러서 확인했었어. 그러고는 금방 잊었다. 2024년은 청룡의 해였다고 하네. 1년은 무언가를 뒤돌아보기에 적당한 기간이니까, 다들 이즈음에 꼭 올해의 노래나 영화, 책, 음식, 주렁주렁 제목을 붙여 순위를 매기고, 오래 덮어둔 연초의 계획을 열어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알지도 못하고 지나온 날을 다시 곱씹게 되는가 보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종이 울리면 제법 텔레비전이나 뉴스엔 흥미로운 얘기가 쏟아지지. 보신각종은 당연한 연례행사지만,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면 보이는 이야기들. 꼭두아침부터 정동진에 찾아가 첫 일출을 보는 사람들, 어떻게 찾는진 몰라도 산부인과까지 가서 취재하는 새해 첫아기, 무언가의 첫 계획, 첫 일정, 첫 행보… 작년에도 아마 그 전날에도 벌어졌을 일인데도, 나는 새해 첫날이면 어제와 작별한 거 같은 생경하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느끼곤 했어.
잘 지냈냐는 얘기도 없이 편지를 덜컥 시작했네. 12월이라고 크게 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12월 1일 아침을 달콤한 초콜릿으로 마주했어. 나는 무려 두 개의 어드밴트 캘린더를 갖고 있어서, 어제부터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까지 매일 두 번 초콜릿을 먹어야만 하게 됐어. 아무도 강요하진 않지만, 꼭 하루에 한 칸을 해치워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과 부채감을 지고 있거든. 하나는 지난번 아일랜드에 갔다가 D의 어머니께 받아 온 캔드버리, 나머지 하나는 플랫메이트 J와 M이 파리에 갔다가 생일 선물로 사다 준 린트! 처음 보지만 맛은 익숙한 캔드버리 초콜릿 간식을 아침에 먹고 테디베어 에디션으로 어쩐지 귀엽고 요란한 린트 초콜릿은 늦은 저녁에 먹어. 아주 달콤한 하루들!
한 해의 마지막이 초콜릿처럼 술술 녹듯 지나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즈음이면 떠오르는 익숙한 감각을 마주했어. 얼굴이랑 손은 거진 반쯤 얼어가는데, 옷 안은 더워져서 식은땀처럼 흐르고, 바람이 불면 온몸이 공평하게 추워지는 그 불쾌하고 텁텁한 감각 있지. 이곳 암스테르담에서는 비와 자전거가 합해져서 최악에 달하게 됐어. 엊그제에는 왕복 한 시간을, 자전거를 탔는데 온몸이 지쳐서 오는 길엔 틈만 나면 길가에 잠깐 서서 쉬고 다시 출발하고를 반복했어. 오늘은 학교를 가는 길에 비가 쏟아졌는데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려서 하염없이 빗속에서 페달을 밟았어.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돼서 강의실에 도착했지. 중청 색의 청바지가 진청이 되도록 비를 맞아서 수업 듣는 내내 추위에 떨었어. 지난 수요일에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여전히 테니스를 잘 치지 못하고, 그래서 자꾸 코치님의 특별 지도와 조언을 받고, 자전거를 타면 모두에게 추월당하고, 그럼에도 숨차는 게 싫어 천천히 달리고, 비가 오면 겉옷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지만, 바지는 어쩔 도리를 못 찾고, 간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대고, 졸림을 못 버티고 낮잠에 빠지고, 듣던 노래만 듣고, 먹던 음식만 먹고, 보던 사람만 보는데, 12월이라니, 벌써 12월이라니!
12월만 되면 초연해진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한 해는 꼭 뚜벅뚜벅 걷는 열한 개의 달과 가만 서서 걸어온 길을 바라보는 한 개의 달로 나뉘는 것 같기도 하다. 뭐든 제자리인 것도 가만 보면 어딘가 당도해 있는 걸 보게 되지. 다 비슷하고 여전해 보이는 나의 삶에서 뭐가 빠져나가고 들어왔는지, 나는 어디까지 혹은 어디로 걸어왔는지 보기. 그래서 나는 초연할 수가 없어. 이 달콤쌉싸름한 마지막을 꼭 나는 씹고 뜯어봐야 알겠거든.
내일 캘린더를 열면 더 맛있는 초콜릿이 나왔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타야 하니까 기왕이면 비도 안 왔으면 좋겠어.
늘 어디선가 무언가는 시작되고 있으니까,
따듯한 12월의 시작을 맞이했길.
다시 편지할게.
추신.
연말연시에 꼭 하는 너만의 의례가 있니?
2024년 12월 2일
암스테르담에서
군것질을 참으면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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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10 - 2024 DEC 2nd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