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2.

by 가을

_ 에게


글은 무엇을 할 수 있지? 나는 매달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했지. 삶을 둘러싼 것들부터 삶 깊숙이 파고들면 있는 것들까지.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힘든 시기에 나온 시를 즐겨 읽었어. 압축되었지만 선명한 단어. 유려하고 연약한 문장과 칼칼하고 거친 문장. 어느 쪽이든 시대를 찢고 나오는 언어. 시를 따라 읽고 또 되뇌었지. 시에는 신문 사회면도 짚어낼 수 없는 우리에게 닥친 어둑하고 선득한 구석을 집요하게 풀어내는 힘이 있었어. 다른 단어나 문장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그 종잡을 수 없는 아득한 힘. 그런 힘을 선망해서 국문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었어. 그렇게 문학 주위에 있으면 나도 그 힘을 닮을 수 있을까 해서.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건 이거였어. 나는 글로 무엇을 하는 거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무엇을 할 수 있지?

나는 항상 세상을 낙관적으로 믿고 싶었다. 순진할 정도로 바라고 싶었어. 그게 안 될 정도로 견디기 힘들면 농담으로 흘리려 했어. 그럴 때마다 마음이 까끌까끌해졌다. 우리는 일기마저도 미화한다지만, 가끔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 때 너무 많은 것을 아름답게만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어. 그런 생각마저도 기이한 낙관으로 그리고 농담으로 넘어갔을까.


너에게 편지를 보낼 월요일, 그러니까 오늘을 떠올리며 지난 수요일에 썼어. 전날 밤 일어난 일을 떠올리면서 어떤 무기력함을 떨치지 못한 채로. 그리고 다시 오늘 이어 쓰기 시작한다.

이청준의 소설이나 김수영의 시… 어느 시대의 문학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눈밭에 맨발로 서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곤 했어. 손발에 감각이 들지 않고 얼굴엔 서리가 껴서 앞도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상상을 했어. 나부끼는 진눈깨비로 온 세상이 희끗해진 와중 그 한가운데 선 한 사람. 차갑겠다. 슬프겠다. 무섭겠다. 외롭겠다.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어떤 생각을 했지? 목이 부어오른 듯 아프다. 가슴이 움츠러져서 등이 굽은 것만 같다. 눈 아래로 눈물 아닌 어떤 게 차오른 것처럼 울컥한다. 다시 시대 문학과 만난 오늘이 참 서글펐다.

하지만 다시 눈밭의 사람으로. 나는 한 주 동안 광장으로 걸어간 친구들을 떠올렸어. 차갑고 슬프고 무섭겠다. 이건 추측과 추정이 아니라 확신의 기분. 우리는 정말 차갑고 슬프고 무서운 한 주를 보냈지. 또 다른 확신의 기분. 외롭지 않다. 겨울에 나무는 앙상해지는 대신 여름 동안 보지 못했던 이파리 너머를 보여주지. 흩날리는 눈 너머의 것. 함께 눈밭에 발을 파묻고 서 있는 나무처럼 보이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과 컨퍼런스를 아침에 돌려봤어. 이런 구절이 있었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눈밭 위의 나무들을 말로 글로 잇자. 거기엔 생명이 흐르고 사랑이 흐르고 그리하여 무언가를 바꾸어 낼 힘이 흐를 테지.


십이월에 들어 앙상한 키 큰 나무들을 지나치면 나는 그 너머를 보려고 애쓴다. 그 너머로 연결될 금실을 상상하면서, 덜 무기력한, 조금 더 강인해진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써 보낸다.

너와 나는 외롭지 않아.

안녕. 다시 편지할게.


추신.
잘 지냈니?


2024년 12월 9일

암스테르담에서

가지를 뻗는 마음으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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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10 - 2024 DEC 9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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