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3. 파리 여행기

by 가을

_ 에게


잘 지냈니?

나는 주말을 파리에서 보내고 돌아가는 길. 아침에 갓 구운 빵을 사서 버스에 탔을 땐 밖이 환했는데, 이제 창밖은 어두컴컴해서 가로등과 반대편 도로 전조등만 겨우 눈에 들어와. 일곱 시간의 여정도 이제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이틀 간의 여행이 한 시간 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처럼 느껴져.

파리에서 석사 공부를 시작한 J를 보러 다녀왔어. 시월 말에 오랜만에 날 볼 겸해서 암스테르담으로 놀러 왔었는데, 그때 꼭 십이월에는 파리에서 보자고 약속했었거든. 지난 토요일 자정이 조금 넘어야 간 버스를 타고 파리로 향했어. 아침에 도착하니 목이며 어깨며 온몸이 뻣뻣해져서 J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만 잠깐 나눴지. J는 학교 프로젝트로 외출하고 나는 금방 잠에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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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서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어. 2년 전 나의 또 다른 J와 서유럽을 횡단할 때 파리에 왔었는데, 그땐 여름 날씨에 들떠서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고, 첫 유럽 여행이라 부루마불처럼 랜드마크만 골라 다녔었거든. 이번에는 그때 빼놓고 가지 않은 미술관이나 박물관만 골라 다니기로 했지. 바깥엔 이미 줄이 빼곡히 서 있었어. 춥고 피곤한 몸으로 한참 기다리다 들어간 미술관. 온 벽을 둘러싼 모네의 연꽃 연작에 눈이 뜨였어. 흐릿하고 덧대어진 붓질이 만드는 물결 같은 연못, 떼 지어 다니는 물고기처럼 떠 있는 연잎, 그리고 버드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잎 새로 보이는 물길.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바로 앞 소파에서 앉아 바라보며 한참 시간을 보냈어.

이어서는 아래층 Paul Guilaume의 수집 전시를 봤고, 그러고는 퐁피두에 (또 줄을 한참 서서) 가서 근현대 미술 전시를 봤어. 이름 대면 알 만한 예술가란 예술가는 죄다 한 번쯤 파리에 왔었지. 작가며 화가며 시인부터 무용가까지…. 이 년 전 여행에서도 길을 우연히 걷다가 헤밍웨이가 살았다는 집을 지나쳤었는데, 숱한 거리 속에 그런 발자취가 얼마나 많을지를 다시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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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J와 저녁 식사를 한 곳은 Bouillon이라는, 전형적인 파리지앵 레스토랑에 다녀왔어. 사실 프랑스식 기사식당이라고 하면 되는데, 내부가 무척 크고 번잡해. 웨이터가 한 팔에 대여섯 요리를 나르고 종이로 된 테이블보에 주문을 받아 적지. 우리가 간 곳은 19세기말부터 파리 한가운데 자리 잡은 큰 곳이었는데, 지하철역 출구 쪽에서부터 이미 블록을 둘러싼 줄이 보였지. 서울에서 줄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J는 파리 어디를 가든 줄 서는 건 마찬가지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뒤에 이어 섰어. 특출 난 음식은 아니래도 프랑스 전통 가정식 음식을 가볍게 먹어보기 좋았지. 디저트로 휘핑크림이 얹어져 나오는 밤 퓌레를 골랐는데, 그 밤 퓌레만 따로 사서 가고 싶었을 정도로 달짝지근하고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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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에 갈 일이 따로 없다던 J는 샹젤리제 거리의 크리스마스 조명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파리의 밤길을 이끌었어. J는 고향이 몬트리올인 퀘벡쿠아라서 프랑스어가 모국언데, 그래서 자꾸 영어로 한참 이야기하다가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나오면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해서, 어쩐지 나도 멋지게 발음을 따라 하게 됐다. 봉쥬르, 봉수아, 메르씨, 오흐부아! 이런 단어, 그리고 사바, 노, 트레비앙, 이런 짧지만, 프렌치들이 하루에 수백 번도 반복하는 단어들을 주섬주섬 따라 했지. 아무튼, 개선문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어. 가게들은 서서히 문을 닫고 도로 위 차는 꽉 막히고 관광객들로 득실거렸지만, 노란빛 조명으로 둘러싸인 나무로 메워진 거리는 참 아름다웠어.

어딜 가나 아름다운 파리. J는 가끔 학교를 가다가도 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놀라곤 한다고 했어. 색칠해진 대문이나 잘 꾸려진 창문과 외벽 울타리, 건물에 새긴 벽화나 조각, 그 위로 막 얹어진 그라피티, 티는 안 나지만 가만 보면 양말색까지 신경 쓴 옷차림새, 오래 관리하고 꾸준히 입어온 태가 나는 가죽 재킷, 구두, 코트, 스웨터. 먼 예전부터 오늘까지 고루 섞인 모양새가 아름다웠어.

어딜 가나 맛있는 냄새가 나는 파리. 19구와 20구가 걸쳐진 경계에 있는 J 집 코앞에도 블랑제리 2개가 있었고, 도심으로 가서는 코너마다 블랑제리가 있었어. 바게트 트라디시옹은 쫀득하고 바삭했고 잠봉과 에멘탈 치즈가 든 샌드위치를 먹으면 한 끼가 거뜬해졌지. 달달한 패스츄리든 과자든 집어 먹으면 기분 탓인진 몰라도 배로 맛있게 느껴졌어.

오늘 아침 J는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상하지만 우린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게 분명하단 얘기를 했어. 막 일어나 눈을 비비며 얘기하는데 다시 보는 날에는 J 네가 어쩐지 파리지앵이 되어있을 거 같다고 농담하려 했지만 그건 진짜 그런 까칠하고 재수 없는 파리지앵이 되었을 때나 얘기해 주려고.


돌아가는 길 내 가방에는 떠나기 전 바지런히 이곳저곳 들러 사 모은 크루아상, 빵 오 쇼콜라, 피스타치오 칩 롤, 이름 모를 쿠키, 감자칩, 블루치즈가 들어 있지. 당분간은 이걸로 파리 여행을 연명해야지!


편지를 쓰다 보니 버스를 내릴 때가 다 됐네.


다음 주 네게 편지할 때쯤이면 암스테르담에서 학기를 마무리하고 마지막 여행에 올라와 있을 거야. 이것저것 보여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더 들뜨고 신나는 한 주 보내길. 이만 줄일게.


추신.
가장 좋아하는 빵이 뭐니? 나는…. 그래도 참깨빵이 가장 좋다.


2024년 12월 14일

돌아가는 버스에서

파리를 떠올리며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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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10 - 2024 DEC 16th

발행인 김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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