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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Jul 22. 2022

치마의 세계 정복기_쓰라린 영광의 상처

[우리들의 글루스] 매일 기록하기 04/10

오늘은 아침부터 일정이 빼곡했다. 비록 12시가 넘었지만 엉금엉금 오늘의 글을 쓴다.


모처럼 또각 구두와 비싼 원피스를 입고 출근 시간대에 강남행 버스를 탔다. 고백하건대 나는 공주과가 아니다. 결혼을 준비하며 웨딩드레스를 보러 다녔을 때 '신부님은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공주 스타일? 여왕 스타일?'이라는 질문에 나는 '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죠?' 하고 대답했다. 여자가 인생에 한 번 신명 나게 공주놀이를 하러 드레스 투어를 다닐 때 나는 한 번 간 곳에서 한 번에 계약을 했다. 도저히...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 같은 내 꼴을 마차 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믿어 주실 분...?


아무튼 나는 요즘 유니섹스라 불리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말하는 '공주 스타일'이라 함은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는 것이다. 교복 외에 치마는 괜히 부끄러웠고, 뭐랄까 '공주 같은' 모습이 내겐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다. 그냥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뭐랄까 너무 차려입고 신경 쓰는 사람 같이 보이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마와 구두는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사람이 늘 편한 차림으로만 지낼 수는 없다. 스무 살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점점 나이가 들 수록 차려입어야 하는 상황들이 자주 발생한다. 차려입는다는 것은 그 상황과 대상에 대한 예의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차려입음'이 꼭 '공주 스타일'인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여성은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어야 정장이고 최대한 차려입은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차려입어야 하는 때에 치마와 구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입은 내 모습을 나만 어색하고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우습지만 점점 깨닫게 되었다. 칭찬은 그 거대한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칭찬이 나를 치마 입지 못하게 할리가 있나. 나는 치마를 야금야금 사기 시작했다. 치마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그놈의 '차려입을 때' 입을만한 각이 지고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치마들을 샀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대학생활을 하는 학생이 그렇게 각을 잡을 일은 사실 거의 없다. 나는 다행히 학회를 했었어서 몇 번 입었지만, 그건 그냥 까만 치마 하나 정도만 있으면 됐다. 그래서 나는 아동학과 친구들을 따라 조금 짧은 치마들을 도전해 보았다. 하지만... 나는 상체에 비해 다리가 겁나게 도톰한 하(체)비(만)이다. 짧은 치마는 집 밖을 나가기도 전에 내가 보기 흉해서 관뒀다.


하, 이쯤 되니 치마가 정말 입고 싶어졌다. 뭐 차려입을 때 필요하고 뭐고 여성스럽고 공주 같은 게 어색하고 뭐고, 나도 내게 어울리는 치마를 꼭 찾아 입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처음 치마를 찾기 시작했던 '차려입기'의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전략을 바꿔 긴치마들을 공략했다. 

오, 이 것은 꽤 성공적이었다. 긴치마를 입으니까 치마를 입고 싶다는 목적을 달성하면서 내가 부담스럽게 여기는 너무 공주님 스타일도 아니면서, 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긴치마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치마라 함은 무조건 무릎 아래, 종아리 절반 가량을 덮는 길이만을 취급했다. 


그리고 원피스! 이것은 과연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상의와 하의를 센스 있게 맞춰 입어야 한다는 그 번거로운 창작의 과정 없이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아주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의상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원피스는 천재다. 벌거벗고 있어도 더울 것 같은 여름에 두 벌보다는 한 벌을 입는 것이 심리적 부담감이 적고 경제적이며 바람이 위아래로 막힘 없이 통하니 시원함은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 난 여름에 원피스 입기를 좋아한다.


이 것이 교복 치마 외에는 바지밖에 입을 줄 몰랐던 내가 치마를 입게 된 여정이다. 치마를 입기 시작하니 바지로 제한되었던 스타일링에 치마가 더해져 좀 더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바지밖에 모르던 세계에서 치마의 세계로의 입문은 꽤나 큰 도전이었다. 이 큰 도전이 만족스러우니 그다음 도전들은 점점 과감해졌다. 단조로운 색과 무늬, 소위 심플한 모양의 치마에서 색깔도 들어가고, '긴치마' 내에서 길이도 왔다 갔다 하고, 무늬도 들어가고 프릴도 달리고,.. 사실 이 도전들은 나에게만 과감했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별거인가 생각하겠지만 나를 오래 보아왔던 지인들은 내가 치마를 입으면 '새로운 스타일이네! 잘 어울린다! 예쁘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 


그러다 오늘, 그 정점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나는 오늘 '공주님 스타일'의 옷과 구두를 입고 외출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입은 원피스는 남편과 친정엄마가 골라준 것이다. 나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스타일이었는데, 사실 내심 한 번 입어보고 싶긴 했다. 그렇지만 아직 내겐 너무나 높은 산 같아서 혼자서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공주님... 원피스...'


(세상의 모든 공주님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오늘의 글감인 원피스 사진을 첨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게 오두방정을 떨 만큼 객관적으로 대단한 원피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100% 주관적인 생각과 오바육바를 떨고 싶은 개인적인 표현 방법이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은색 포인트가 들어간 하얀색 트위드 원피스와 연분홍색 뾰족구두.


우스운 것은, 하루 종일 너무 어색했다. 괜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고 살쪄 보이는 것 같고 흰색이니 뭐가 묻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예쁘다는 칭찬은 많이 받았다.(우하하?) 그리고 슬픈 것은 그 망할 연분홍색 뾰족구두가 뾰족뾰족 내 발가락과 발 뒤꿈치에 상처를 냈다는 것이다. 평소 슬리퍼나 운동화만 신어 마찰이라곤 크게 겪어보지 않은 나의 보송한 발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냐고 소리소리를 아주 대단하게 질렀다. 하지만 곧 잠잠해지리라... 이 것은 정복가의 영광의 상처다. (구두와 공주 원피스는 짝꿍이니까, 함께 정복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굴복했다. 아니, 후퇴 전략을 선택했다. 

결국 나를 그렇게 차려입게 만든 볼일을 끝내고 부탁드려 가져다주신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구두를 신었을 때는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의 존재가 이토록 강렬하고 생생한가 싶었는데, 슬리퍼를 신으니 내가 지금 걷는지 나는지 생각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로를 걸을 수 있었다. 푸하하


삼선 슬리퍼로 얻은 자유함


귀가 후 원피스를 고이 벗어 드라이를 맡겼는데, 드라이 비용이 16,000원이 나왔다. 비싼 원피스는 세탁도 비싸구나... 구두는 상자에 넣어 신발장 깊숙한 곳에 고이 두었다.


아아... 나는 언제 이런 공주님 스타일이 어색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공주님 스타일을 싫어해서, 누가 봐도 나와 어울리지 않아서 '안 입는 것'이 아니라 혼자 괜히 어색하고 불편해서 '못 입는 것'은 싫다. 나는 공주님 스타일도, 머슴 스타일도 다 정복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며 걸치고 싶다 이 말이다! 

욕심인가? 싶지만 이십 대 초반 모든 것이 생경하게 다가왔던 치마의 세계가 지금은 어느 정도 정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꽤 도전해 볼만 하지 않나 싶다.


앞서 고백하건대 나는 공주과가 아니라고 했지만, 다시 한번 고백하건대 공주과가 아닌 것도 아니다.

나는 공주도 될 수 있고 왕자도 될 수 있고 머슴도 될 수 있고 나그네도 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게 옷차림이든 뭐든 간에. 사람이 상황에 따라 내보일 수 있는 카드가 많다는 건 꽤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생경하지만 한 걸음씩 도전하고 내게 맞는 것들을 찾아보고 시간을 가지고 익숙해지면 그것이 내 옷이 되고 내 스타일이 된다. 내 정복지가 더 넓어지는 것이다. 


오늘 나는 흰색의 공주님이었지만 내일 나는 검정의 댄버스 부인(소설 <레베카> 속 인물)이 될 예정이다. 사각사각 시원한 소재의 검은색 원피스가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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