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글루스] 매일 기록하기 05/10
2주간 주말을 제외한 매일 글 한 편씩을 쓰는 모임을 하고 있다. [우리들의 글루스] 매일 기록하기
원래는 금요일인 어제 다섯 번째 글을 써서 올렸어야 했는데, 토요일 저녁인 지금까지 못 쓰고 있다. 하하!
글감이 번뜩일 때는 언제까지 쓸 거냐는 남편의 칭얼거림에도 '잠시만! 30분만!' 하면서 손가락이 아프도록 자판을 두드리는데, 어제부터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엉망진창이어도 숙제는 꼭 해야지! 하는 의외로 모범생 스타일인지라 글감을 찾아 이리저리 내 자투리 글들을 뒤져보았다.
이것저것 들추다 2017년에 했었던 글쓰기 모임의 흔적을 찾았다. 글쓰기는 나의 오랜 관심분야라 대학생 때 작가와 함께 글쓰기 하는 모임을 찾아서 두 달 정도 참여했던 적이 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여성 신인 작가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모임의 주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상 깊었던 활동이 있었다.
작가님이 매일 단어 한 개를 카톡으로 보내주시면 '그 단어를 넣은 한 문장'을 지어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뭔가 싶을 수는 있겠지만, 생각보다 꽤나 재밌는 놀이다. 별 것 아닌 단어 하나가 하루 종일 주인공이 되어 '엣헴 나를 멋진 문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니 종일 심심할 틈이 없다. 커다란 알사탕 하나를 입에 쏙 넣고 하루 종일 오물오물 열심히 굴려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딱 한 문장으로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생략되는 앞뒤 맥락이 또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소설 속 열린 결말처럼, 내 마음대로 상상해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어떤 상황인 걸까, 어떤 마음이고 어떤 표정일까,.. 내가 만든 한 문장으로 또 커다란 알사탕을 만들어 이리저리 굴린다. 그 맛은 달달할 때도 있지만 쓰릴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고, 사랑스러울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다. 어떻게 굴리느냐 그 맛은 천차만별이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이렇게 흥미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참 축복이다.
그렇게 단어, 문장 놀이를 하다 짧게 글을 쓰기도 했다. 주인공은 나일 때도 있지만 그 문장과 어울리는 '그 사람'일 때가 더 많았다.
그때의 단어들과 문장들, 가끔 이어 붙인 짧은 글들을 몇 개 모아 적는 것으로 오늘의 글쓰기를 퉁치려고 한다. 자투리 문장이어도 기워서 글이라 하면 그만이지! 하하!
[불빛]
그날 아롱이는 불빛 아래 겸허히 모았던 손과 고개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내 최선의 몸무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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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째 가만히 앉아 슴벅이고만 있다. 음식 냄새난다며 엄마가 켜 두었던 향초가 아롱거린다.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잘 새겼다 생각했는데, 보내버린 시간들에게 쥐여준 것들이 너무 많았나 보다. 사진을 오래도록 보고 있어도 그 애만은 우련하다.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눈까지 감아본다. 손과 고개도 함께 감긴다. 그 애는 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 있다. 내가 외면하고 싶어 그 순간 잘 보지 않았겠지. 그저 뭐든 태울 것이 동이 나면 절로 꺼지겠지 하는 심보로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제한된 시간과 그것이 놓인 공간이 있다면 분명 타오르고 사그라든다. 그렇게 다시 고독해질 것이다. 그리고 한 해가 또 가겠지. 경험인지 본능인지 어쨌든 그녀는 나보단 똑똑했다. 향초가 충분히 탔는지 라벤더 향이 코 안까지 가득하다. 향긋하다 못해 독해진 향초의 불을 한 숨에 꺼버린다. 짧고 강한 호흡으로. 그렇게 지나간 한 해를 구태여 다시 보냈다. 애써 기억하기 위해 앉았었는데, 결국 촛농 조금을 남기고 다 태워 버렸다.
그날 아롱이는 불빛 아래 겸허히 모았던 손과 고개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내 마지막 몸무림이었다.
[종이]
날 때는 빳빳하고 흰 종이 같던 것을 지나온 세월 동안 누가 그렇게 움켜쥐었다 놓았는지, 할머니의 손등은 굽이굽이 누렇게 둥그러져있다.
[구름]
끝내 내뱉지 못해 삼켰던 것들이 구름이 되어 내 하늘에 맺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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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어둡다. 구름이 가득해서 햇빛이라고는 잠시 삐져나오는 한두 줄기가 전부다. 소중해질수록 혹여나 잃을까,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끝내 내뱉지 못해 삼켰던 것들이 구름이 되어 내 하늘에 맺혀간다. 그리고 내 하늘에 더 이상 자리가 없을 때 결정끼리 부딪히며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겠지. 그렇게 막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올 때 구름은 걷혀갈 거다.
[바람]
그 거대한 바람의 움직임에 일치될 때, 비로소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겠다.
[침묵]
그날, 그의 침묵에 뚜드려 맞아 절뚝이며 돌아와야만 했다.
[연필]
살이 오른 두 뺨 사이 삐죽 튀어나온 입술, 열심히 할 테니 5분만 일찍 끝내 달라고 옹알거리며 연필을 굴리는 네가 어찌나 귀엽던지
[그리움]
일상이 낯설게 사무치는 것, 그런 게 그리움일 거다.
[추억]
기억을 다듬어 추억을 만들었다.
[기억]
실재와 허상의 중간, 그 언저리에 기억이 머무른다.
[미소]
절제된 감정의 포물선, 미소.
[상자]
뭐라도 채워둘 거라며 쟁여둔 빈 상자가 하나, 둘, 셋, 그렇게 방 한편을 다 채워버렸다.
[숨]
숨이야 한 번 들이쉬었다 내어쉬면 그만이지만, 그 안에 설움이 너무 많이 묻어 나와 눈가에 맺힌다.
[냉기]
그녀의 반달 같이 짙은 미소 속에서 애섧은 냉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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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애섧은 냉기가 온몸을 떨게 할 때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차를 애써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은, 어미를 잃은 갓난이가 공갈젖꼭지를 온 힘 다해 물어 빠는 것과 같은 이유일 거다.
[수첩]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해의 시작마다 다짐하며 수첩의 첫 장에 적어두지만, 경계 없는 해의 끝에서 별을 노래할 힘 없이 죽어가는 나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하는 나는 어디에도 없다.
[핏줄]
온통 텁텁한 붉은빛을 품은 그 애의 핏줄에는 마른 장미꽃이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
잠길 듯한 생각의 무리에 매일 밤 질식사하는 사람.
[문]
문틈 사이로 지켜보는 그들의 춤사위에는 함께해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사랑으로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