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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Jul 20. 2022

나의 비빌 언덕, 나를 만들어준 존재들_할머니 할아버지

[우리들의 글루스] 매일 기록하기 03/10

출국 전 인사를 드리러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몇 해전 팔순을 넘기셨고, 할머니는 올해 팔순이셨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떠도는 천문학적 숫자들 앞에서 80이라는 숫자는 한 없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인생에게 80이란 숫자가 얼마나 큰지 그들의 주름진 얼굴을 보면 느껴진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정말 옛날 분들이시다. 6.25를 겪으셨고, 할아버지는 해병대 초반 기수 셔서 정말 말 그대로 귀신도 때려잡는 열악하고 무시무시한 군생활을 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네 가문이 그래도 좋은 가문이라고 듣고 시집을 왔는데, 가세가 이미 기울어진 뒤였고, 본인의 남편 될 사람은 세상 망난이, 장난꾸러기였다.(할아버지가 본인을 그렇게 표혔하셨다...ㅎ) 할아버지는 너무 귀하게 오냐오냐 크셔서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고, 동네에서 늘 대장 역을 하며 여기저기 애들을 끌고 다니며 지독한 장난을 치고 다니셨다고 한다.


경찰이셨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첫째(우리 아빠)를 낳고 제주도로 발령이 나셨다. 제주도에서 혼자 지내시다가 할머니가 건너가셨는데, 그 당시 제주도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아름답고 여유로운 제주도가 아니었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육지와 사는 방식도 말도 너무나 다른, 갓난아기를 들쳐 엎고 막 내려온 새색시에겐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세 식구가 밥을 먹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밥상 하나 없고 도마 하나 없었고, 그래도 경찰이고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일한다고 하니 돈을 잘 버는 줄 알고 시댁에서는 계속 돈을 부치라고 해서 가사도구를 살 돈도 없었다고 한다. 진짜 이 시절 가난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한민국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에게도 80년은 큰 숫자였다 보다.

너무 가난해서 첫째(우리 아빠)는 영양실조에 걸려 배는 빵빵해지고 사지가 힘 없이 축축 쳐지는데 할머니는 둘째를 임신하셨다. 그때 용인에서 놀러 오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지, 친척인지(말씀해주셨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하는 분이 오셔서 그 처량한 꼴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다고. 잘 사는 줄 알고 왔는데 애가 굶다 못해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분이 비장의 묘책을 내셨는데! 그것은 바로 '쥐고기'!!! 쥐를 잡아 구워 먹이니 조금씩 살이 붙으면서 살아났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 아빠는 죽을뻔했다가 쥐고기 덕분에 살았다.


할머니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야기꾼이시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지만 얼마나 맛깔나게 이야기를 하시는지 저번에 들은 얘기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재밌게 듣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인데, 할머니 말씀하시는 걸 녹음하거나 영상을 찍어 놓을걸 그랬다. 점점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에 쥔 모래처럼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아무튼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렇게나 옛날분들이시다. 대학을 휴학한다고 하면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그런 줄 아시고 걱정하셨고, 졸업하고 잠깐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니 '평생직장을 가져야 하는데 어떡하냐...' 하며 근심 어려하셨다. 내가 미얀마에 2년 정도 살러 간다고 했을 때(25살이었다.) '얼른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야 하는데...' 하시며 안타까워하셨고, 지금은 '예쁜 애기 얼른 낳아와~' 벌써 한껏 귀여워하시는 표정으로 이야기하시는 분들이시다. 요즘 밖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면 큰일 날(?) 소리들인데, 나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런 구닥다리 말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감사하고 죄송하고 든든하다. 이 세상에 이분들만큼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해 줄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 끝에는 늘 "네가 좋은 대로 해라. 네가 행복하고 잘 사는 게 최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거면 된다." 한 마디 꼭 붙이신다. 이분들의 사랑은 갚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첫째 아들의 첫째 손녀딸이다. 심지어 우리 엄마도 첫째 딸이다. 그래서 나는 양가에서 사랑을 정말 어마 무시하게 받으며 컸다. 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는 이야기들 중 나의 어렸을 때 이야기도 있다. "얘는 자고 일어나면 꼭 이렇게 웃으면서 나왔어. 우는 법이 없어서 얼마나 예뻤는데." 하는 전설 같은 아기 시절 이야기. 차를 타고 어딘가 갈 때마다는 "어렸을 때 같이 터널을 지나가면 창문에 꼭 붙어서 '할무니~ 터널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했어. 그 쪼그만 게 말을 얼마나 예쁘게 하던지." 하며 터널의 반짝이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어린 나의 이야기. '할머니 머리 하셨어요?' 한 번 물어보는 날이면 "할머니 집에 오면 할머니 머리를 이렇게 빗어서 보고 저렇게 빗어서 보고, '아이 예쁘다. 할아버지가 오셔서 보면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누구야! 하시겠네!' 하면서 얼마나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는지 몰라." 성대모사까지 맛깔나게 곁들이며 이야기를 해주신다.


손자 손녀 예쁜 건 자식이랑은 또 다르다고 한다. 본인 자식을 키울 때는 먹고사는 게 바쁘고 모든 게 서투르고 잘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에 예쁜지 잘 모르고 열심히 살다 보니 다 커 있다는데, 손자 손녀는 그냥 마냥 예쁘기만 하다고. 내가 그랬나 보다. 할아버지가 꽤 거치시고 무뚝뚝하셨다던데, 내가 아는 할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으시고 '예쁘다 최고다 건강해라 밥 잘 챙겨 먹어라' 하시며 좋아한다는 아이스크림을 수십 개(몇 개가 아니라 수십 개...) 냉동실에 꽉꽉 채워 놓으셨던 분이시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차 없이 서울에 사셨는데, 엄마는 나를 낳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디 간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용인에서부터 차를 끌고 오셔서 어디든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셨다고 한다. 진짜... 찐이다 이분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미얀마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 정확히 말하면 엄청 서운해하신다. 첫 손녀에 첫 손녀사위를 곁에 두고 계시고 싶어 하신다. 미얀마에 가기 전에 그래도 좀 자주 뵙고 연락드리려고 몇 번 놀러 가고 전화드리면 '뭐하러 이 늙은이들한테까지 신경을 쓰냐. 너네 바쁠 텐데 그러지 말아라. 오지 마라.' 하시면서도 가면 '자주 와서 너무 예쁘다. 너무 좋다. 어쩜 이렇게 예쁜 짓을 잘하냐.' 하시고 어쩌다 전화 한 번 하면 '전화해줘서 고맙다. 할머니 생각해줘서 고맙다.' 하신다. 나이가 들면 뭐가 그렇게 미안할게 많고 고마울게 많은지. 어쩌면 부모고 조부모이니 당연한 것을 매번 고맙다 하시고 다 너희 덕분이다. 얼마나 힘드냐. 고생이다. 애쓴다. 말씀해주시니 혹여나 있을 미운 것도 사르르 녹아버리고 그저 그분들이 주신 사랑만 남는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외에 나갔었고, 한국에 있을 때도 바쁘면 자주 못 뵈고 그랬는데 이번 출국 전 할머니 할아버지 뵙고 온 것을 이렇게 기록하는 이유는 '이번이 마지막일까 봐'다. 

요즘 90세 100세까지도 거뜬하다고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다. 할머니는 몇 년 전 큰 심장 수술을 하셨고 할아버지도 몸이 좋지 않으시다. 얼마 전 코피가 멈추지 않아서 우리가 급하게 모시고 응급실에 갔던 적도 있다. 편찮으시고 갑자기 일이 생겨도 우리는 바로 오지 못할 수 있다.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게 얼마나 말로만 쉬운 일인지. 다음번 한국에 왔을 땐 계신다고 해도 언젠간 그런 소식을 맞아야 하는 때가 올 거다...


할아버지는 떠나는 우리에게 100만 원을 쥐어 주셨다. 5만 원권 스무 장을 봉투에 담아서. 누구에겐 100만 원이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이건 할머니 할아버지의 전부임을 나는 안다. 그분들의 마음과 사랑과 응원과 기대와 애틋함의 전부임을. 이 100만 원은 남편과 함께 돈을 모으기로 한 통장에 그대로 넣어두기로 했다.


제주도 신혼여행 때 할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셨던 말이 있다.

"할아버지가 이 나이 돼보니까 아쉬운 게 그거더라. 너희는 너무 애쓰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너무 고생하지 말어. 서로 위해주고 사랑해주고 그렇게 살아라 응?"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마자 할머니는 분주하시다. '너희 올 줄 알았으면 호박 다 주지 말고 남겨두는 건데. 뭘 줘야 하나...'

우리 이제 한국에서 밥 먹을 일 많이 없다고 안 주셔도 된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래도 빈손으로 보내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냉장고를 박박 긁어 보이신다. '사과 몇 알 가져가라.' '옥수수 가져가라.' 뭐뭐 가져가라... '많으면 너희 시댁 가져다줘라.' 손녀 시댁까지 챙기신다. 그러다가 '비지찌개 이거 한 번 먹을 거 얼려 놓은 건데 이거 가져가서 먹어라. 가기 전에 한 끼 먹고 가라.' 하시며 비닐에 담아 얼려 놓은 비지찌개 한 덩이를 꺼내신다. 저것도 할머니표 비지찌개를 좋아하는 우리들을 위해 들통으로 끓여 다 주시고 남은 거 당신들 드시려고 조금 남겨 놓으신 거다. 우리 주신 비지찌개에는 엄청나게 큰 고기가 숭덩숭덩 있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꺼에는 가라앉은 살점만 몇 개 있을 뿐이다.


할머니의 콩비지찌개


우리가 "할머니 이제 진짜 그만요!!"하고 외칠 때까지 할머니는 계속 뭐 줄 거 없나 하며 분주히 집안을 누비셨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일고 소파에 앉으시더니 "이제 가라. 줄게 없다." 하신다.


애착 관련 실험에서, 아이들은 낯선 공간에 오면 애착 대상을 돌아본다고 한다. 낯설고 두려운 상황에서 '여기는 안전한 곳인가요?' '내가 마음 놓고 탐색하고 즐겨도 될까요?'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았을 때 애착 대상이 부드러운 미소와 표정, 눈빛 그리고 언어로 '여기는 안전한 곳이야. 내가 너를 살피고 있어. 걱정 말고 마음껏 탐색하고 놀아.'의 메시지를 전해주면 아이는 그때부터 마음껏 탐색하고 놀이를 한다.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낯설고 두려운 상황을 마주하면 마음속 그 어떤 존재들을 돌아본다고 한다. '나 안전한가요? 나 잘하고 있나요? 잘 가고 있나요?' 그래서 안정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안정감을 바탕으로 자존감이 높고 이후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자신을 잘 지키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거라고 한다.


감사하게도 나에겐 이렇게 돌아볼 존재들이 많다. 삶을 먼저 가보고 나를 안전하게 사랑으로 이끌어준 존재들. 야속한 시간과 나의 어리숙함으로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붙잡아 둘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잘 두고 오래오래 돌아봐야겠다. 나의 비빌 언덕, 나를 만들어준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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