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작가관

쓰다 보면 너도 소설 쓸 수 있어

by 아반

인물 내면의 동기와 이유


지난번 포스트에서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소설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 세계에 스토리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거창한 사유나 심오한 깊이의 사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세계에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동기와 내면의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작가의 동기와 내면이 투영되는 과정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작가는 인물의 겉모습만 핥고 지나가는 누(累)를 범해서는 안된다.


독자는 보지 못하는 곳을 작가는 보아야 한다.

작가가 그것을 독자를 위해서 친절하게 설명할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생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독자처럼 그것을 몰라서는 안된다.


왜 소설 속의 인물이 그래야만 했는지 왜 그때 거기서 그것을 했는지에 대한 개연성과 인물의 심리가 맞아야 한다.


작가는 단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고 아름답게 인물들을 꾸미고 싶을 수도 있다.

작가는 작가가 가꾸는 아름다운 화원의 주인이 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현실과 소설과의 괴리는 점점 커져가고 독자는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작가는 현실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더러운 민낯을 마주하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작가는 그것을 만지고 그것을 주무르고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




채식주의자


노벨 문학상을 쓴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편에서 형부와 처제의 그 짓이 나온다.

그것 때문에 청소년 금서가 되고 불매운동까지 일었다.

그러한 현상을 보면서 그것은 더러운 것을 애써 부정하고 싶고 자신은 깨끗하다는 것을 강변하고 싶은 사람들의 투사(投射)적 행위라고 나는 본다.


그것이 소설 속 인물의 심리와 그의 행동의 이유를 설명해 주기 때문에 한강의 소설은 3류 포르노가 아니라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 속의 형부와 처제의 금기시되는 성행위가 인물의 파괴된 내면과 근원적인 슬픔을 설명하는 유일한 열쇠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단지 소설 속 소재의 파격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이 소재로서의 가치를 가져야만 소설이 빛나게 된다.

소재는 도구여야 하지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


소설 속의 인물이 극단적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데에는 그 근저에 깔린 심연의 비밀이 있는 것이고 작가는 그것을 풀어가야 한다.

독자는 아는데 작가만 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은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일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소설 속 인물에 투영하기도 하고 자신을 극단적으로 감추기도 한다.

소설 속의 인물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은 작가의 바람이고 현실은 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자아를 탐색하고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마음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소설 속의 인물들의 관계와 서사가 맞물려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바라보는 소설 속 인물의 가치관, 심리, 마음 상태, 이 모든 것이 바로 소설의 작가관(作家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그냥 쓴다고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언급한 작가의 세계관에 더해 작가의 작가관이 입혀져야 소설이 된다.


작가의 세계관이 소설의 육체라면 작가의 관점이라는 작가관은 소설의 영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