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의 세대] 중에서
■
꾸벅꾸벅
고개가 앞으로 푹 수그러진다.
눈꺼풀을 게슴츠레 들어 올린다.
앞에 다리가 보이고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고개를 조금씩 들어보니 사람들이 흔들리는 열차 손잡이를 잡고 내 앞에 서 있다.
고개가 푹 수그러져 깜빡 존 것이 창피해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다음 정거장 안내 멘트가 나온다.
다행히 도착역을 지나치지는 않았다.
열차가 승강장 입구로 진입해 들어간다.
열차가 멈추고 차가 멈추면 이제 곧 문이 열린다.
내리는 문은 오른쪽이다.
"치익"
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 바로 인파에 휩쓸려 열차에서 하차한다.
고개를 좌우로 젖혀 보고 뒷목을 두드린다.
새벽부터 오후까지 일하느라 고된 발걸음을 이끌고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간다.
지하철 입구를 나와서 건너편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좁은 매대 통로를 지나 제일 안쪽 음료수 코너를 흝어본다.
프리미엄 카페라테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손은 1+1 믹스캔커피 두 개를 집었다.
하나 가격으로 하나는 공짜다.
잠시 지하철역 입구 광장 한쪽 높은 화단 기단에 기대어 섰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이제 곧 서쪽 집으로 들어가려는 듯한 그 짧은 시간,
지하철역 입구 옆에 신학대 학생들이 팻말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사진을 찍고 박수도 친다.
한 청년이 다가와 내게 전단지를 건넨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 앳돼 보이는 청년의 미소.
전단지에는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그려져 있고 그들 앞에 어린아이가 걷고 있다.
"아 이거 타잔이네"
더스틴이 웃으며 말했다.
청년이 웃으며 말한다.
"성경에 있는 약속입니다. 사람과 동물, 자연과 인간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는 약속이에요."
더스틴은 청년에게 가방에 있던 캔커피를 건넸다.
그리고 청년처럼 환하게 웃어본다.
청년이 연신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1+1이었으니까.
하지만 청년의 환한 미소가 가슴에 남았다.
청년들의 생기발랄함이 좋은 에너지를 내뿜는다.
청년이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고
더스틴은 지친 어깨를 펴서 고개를 똑바로 세워본다.
까치발을 하고 몸을 쭉 뻗는다.
조금이라도 나이먹음의 시간을 더디게 하려는 듯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노인의 문턱에 다가가게 되겠지만 아직 마음은 청춘이다.
그렇게 청년과 헤어지고 조금은 에너지를 얻어 집으로 향한다.
전단지를 다시 보고는 혼잣말을 한다.
"타잔 맞네."
더스틴은 타잔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했다.
늑대가 타잔의 휘파람 소리에 개처럼 달려오고
코끼리, 코뿔소가 타잔의 기합 소리에 악당들을 혼쭐 내준다.
그러면 옆에서 타잔의 친구 침팬지, '치타'가 "까까히히" 하면서 배꼽을 잡았다.
저녁을 먹은 후 소파에 앉아 습관적으로 뉴스를 틀어 본다.
뉴스가 심상치 않다.
금리가 연일 오르고 자영업이 거의 고사 수준이다.
다음 뉴스 꼭지에서
민족통합교의 비자금 문제가 다루어진다.
정치인 매수와 뇌물수수 혐의로
통합교 교주 대지의 어머니가 구속된다.
기자들이 검찰로 들어가는 대지의 어머니 뒤에서 질문을 날린다.
"김동인 의원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대지의 어머니 측 변호사가 기자와 어머니 사이를 헤집어 간격을 벌리려 한다.
이어서 다음 뉴스 꼭지가 이어지고
"정부는 종교와 정치의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훼손한 이번 사건을
헌법 위반으로 보고 엄정 수사를 촉구할 것을 검찰에 주문했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에 힘이 실려 있다.
(뉴스 화면의 검찰청 청사의 창문 속으로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면서 장면이 검찰청 사무실 내부로 들어간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무실 책상에서 계좌를 들여다보고 있는 수사관은
숫자가 말해주는 진실의 무게에 짓눌린 듯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담당 검사가 부하 수사관의 모니터 화면을 뒤에서 응시하다가
"덮어!"
김동인 의원과 민족통합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딸려 나오는 게 끝이 없다.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연루되어 있고
정치자금에 연루되지 않는 종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덮어!"라는 상사의 짧은 명령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양심이라는 바위의 무게감이 점점 내리누르는 듯하다.
담당 수사관은 어깨를 툭툭치고
"하나씩 하나씩 먹고 싶을 때 빼먹는 거야."
라고 노련하면서 영악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 다시 뉴스화면의 검찰청 청사 창문을 통해 화면이 줌아웃 되어 뉴스 화면을 응시하는 더스틴의 눈동자에 비친 검찰청 청사 모습으로 바뀐다.)
뉴스를 응시하는 더스틴은
무언가 시대의 흐름을 읽는듯한 표정으로
뉴스를 음미하고 있다.
'오고 있는 것 같아.'
"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현실이 덮쳐온다
(잠시 스르륵 감기던 눈꺼풀, 과거 회상이 여기서 멈춤)
바람에 문이 급하게 닫힌다.
로버트가 차에 실려 있던 음식을 가지고 왔다.
콘치즈 통조림과 유통기한이 지난 비스킷 그리고 믹스커피.
반쯤 딴 통조림을 불이 타고 있는 페인트 통 모서리에 잠시 놔두고 차가운 콘치즈를 데운다.
코펠에 빗물을 받아서 끓여 먹을 수 있다.
5명이 나눠 먹기 적은 양이지만
그래도 쓰러질듯한 허기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
로버트가 다시 코펠을 비가 오는 바깥에 놔둔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한다.
땔감이 될만한 것들을 모아 옆에 쌓아두고
불이 꺼지지 않게 한다.
차에 있는 매트를 넓게 깔아 여자들을 눕게 한다.
다행히 작은 블랭킷(Blanket)을 가지고 왔다
남자들은 건물 숙소에 있는 헌 이불가지를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널브러진 가구들의 문짝과 옆판을 떼어 불 주위 둘레를 둘러쌌다.
그리고 조심스레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본다
불빛에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콜록, 콜록"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휘파람을 분다.
빗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초여름의 밤이라 견딜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