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볼렛 테스트
대학 다닐 때 동기들은 소규모 스터디 그룹을 이루어 공부할 분량을 나누어 서머리 summary를 하고 요약본을 만들어 효율적으로 공부하는데 난 참 우직했다.
나는 어떤 스터디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고 혼자서 공부했다.
적어도 한 과목을 수강했다면 교과서 하나 정도는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매 과목마다 전공 서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500페이지가 넘고 두께가 10cm가 족히 되는 내과학,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 책들을 줄 쳐가면서 읽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갈라파고스섬의 고립된 거북이가 되어 갔다.
한 번은 여자 선배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선배는 나를 보고 자신은 문어체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본다고 했다.
책으로만 영어를 배운 사람이 영어를 딱딱하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로 대화하는데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 한 문장을 모두 이어서 말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입을 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말을 하는 순간 나의 실체가 전부 노출되어 수상한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여자 선배가 신이 나서 말한다.
"얘들아 왓썹! 뭐 재미있는 거 업써?"
내가 대답했다.
"저는 어제 밤늦게까지 전공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어머 쟤 뭐야?)
그날 이후 그들과 나 사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크랙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Doris Salcedo, <Shibboleth>, 2007, Installation at Tate Modern, London.
이 사진은 콜럼비아 작가 도리스 살세도의 '쉽볼렛(Shibboleth)'이라는 미술작품 사진이다.
2007년 영국 런던의 현대 미술관 바닥에 설치된 미술작품으로 콘크리트 균열로 미술관 바닥에 167m 길이의 거대한 크랙을 표현하였다.
미술관에는 크랙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경계가 생겼으며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쉽볼렛이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과 경계를 의미하며 그것이 주는 느낌과 의미를 작품은 표현하고 있다.
길르앗은 에브라임에 앞서 요르단강 여울목들을 장악했다.
에브라임 도망자가 "나 좀 건너가게 해 주시오" 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에브라임 사람입니까?"
그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들이 주문했다. "그럼 '쉽볼렛'이라고 발음해 보시오."
그러나 그가 발음이 꼬여 "십볼렛"이라고 하면,
그를 붙들어 여울목 현장에서 즉시 모가지를 날렸다.
그렇게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의 모가지가 날아갔다.
사사기 12:5,6
에브라임과 길르앗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에브라임이 패배해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망치게 되었다.
이때 길르앗 병사들은 도망치는 길목인 요르단강 여울목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쉽볼렛을 발음해 보도록 시켰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쉽볼렛을 십볼렛으로 발음하였고 그로 인해 에브라임 사람들을 식별해 냈다.
그 전투에서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이 쓰러졌다.
쉽볼렛이라는 성경의 유래는 숭배자와 이방인의 구별을 의미했었는데 쉽볼렛은 현대에 와서 우리가 속한 사회나 문화에서 이방인들과 구별 짓는 문화코드나 구성원만의 언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가 발전했다.
또한 그러한 차별이 주는 부당함과 폭력성에 대한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가령 십 대들에게는 그들만의 문화가 있고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내가 인터넷상에서만 그들과 대화를 한다고 해도 그들이 사용하는 축약어나 은어를 모르면 그들은 금방 내가 4,50대 아저씨라는 것을 간파해 낸다.
우리 사회에는 또는 조직에는 그 사회만의 조직 문화라는 것이 있고
여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 사회와는 다른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는 조직 내의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브런치스토리의 글들도 브런치만의 독특한 발음이 있다.
왠지 우아하고 고상한척하는 고상함,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어야 한다는 그 묽은 미소된장국 같은 싱거움, 아름답지만 아름답기만 한 예쁜 문장들, 전문가지만 A급에는 못 미치는 평범함이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우와 -"하게 만드는 그 정서.
나는 처음에 뭔지도 모르고 브런치 심사 여울목에 섰다.
"쉽볼렛" 해보라고 해서
"쉬발레"라고 했다.
(너무 욕같이 들렸나?)
모가지가 잘려 나갔다.
(아! 이게 이런 거구나.)
바로 다시 여울목에 서서 "시보레"라고 했다
(누가 봐도 너 아니야.)
모가지가 날아간다.
그때부터 열심히 브런치의 발음 연습을 했다.
작가의 서랍에 글을 채우고 수정하고 퇴고했다.
그리고 다시 브런치 여울목에서
쉽볼렛 해보라고 해서
쉽(지) 볼(래) 렛(츠고)라고 또박또박 발음을 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모가지가 잘려 나갔다.
통증이 아려온다.
브런치의 다른 작가 글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 딱히 나보다 발음이 좋아 보이지 않는 작가들도 눈에 띄는데
그래도 우아하게 "쉽볼-레엣" 하는 작가들도 있다.
진심 리스펙 한다.
아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이쯤 되니 브런치 심사팀이 나를 트레이닝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브런치 팀은 참 좋은 사람들이야.
나 같은 사람마저 작가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떨어뜨리는 거야.
강하게 트레이닝시키는 거지.
그래서 정말 열심히 쉽, 볼, 렛
3편의 글을 그림과 함께 정성 들여 준비했다.
그리고 다시 여울목,
쉽볼렛 해보세요.
"쉽, 볼, 렛트"
모가지가 잘렸다.
깔끔하게 잘렸다.
멍했다.
역시 안되는구나.
그래서 어떻게 여기 들어왔냐고???
그냥 오기가 생겨서 바로 다시 여울목에 서서
"쉽올렛"
빠르게 대충 발음하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작가가 하고 싶어요.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서버유지, 트래픽이 다 돈 이래,
브런치 서비스 유지하는 게 카카오 입장에서 돈이 안된대,
초기에는 사용자 확보 차원에서 다 통과시키고 그랬대,
그런데 이제는 브런치가 계륵이라서 90%가 다 탈락이래.)
뭐 이런 생각들로 자위하면서
'빨리 잘라라, 잘라라.'
속으로 되뇌는데...
"합격!!!"
그렇게 5수 만에 합격했다.
(아 - 이게 뭔가???
내가 제대로 발음한 건가? 아니면 정말 불쌍했던 건가?)
기쁘지가 않은데 기뻤다.
드디어 커다란 쉽볼렛 크랙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첫 발을 뗀 나에게 브런치 작가들은 반갑게 환영을 해준다.
나도 당분간 여기서 쉽볼렛 하면서 지내봐야지.
그래도 나는 고립된 크랙 안의 세상보다 크랙 바깥의 자유로움이 더 좋다.
쉬발레라고 자유로이 발음하면서 소통했던 내가
브런치 여울목에서 느꼈던 서러움 부당함 억울함
왠지 나보다 십볼렛이라고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전 블로그에서 조회수가 많은 사람들은 쉽게 통과시키는 것 같은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억지로 쉽. 볼. 렛 했던 비굴함.
지금은 애써 쉽. 볼. 렛.
입에 연필 물고 발음하지만
조만간 나는 쉬발레 할 거야!!!
쉬발레라고 말해도 찰떡같이 쉽볼렛하고 알아들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아반의 발음 쉬발레가 아반의 시그니처가 되면 되는 거지.
나는 나야!
대학시절 갈라파고스섬의 거북이였던 나,
쉽볼렛 여울목을 간신히 건너온 브런치라는 섬이
또 다른 갈라파고스섬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이 든다.
나는 이제 쉽볼렛이라는 거대한 크랙 안에만 갇히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자유로이 교류하면서
지식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칠 거야.
나 구글 애드센스 할 거야.
Photo by Kris-Mikael Kr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