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사의 위반(違反)

웃사는 왜 죽어야 했을까?

by 아반

날벼락


우편함에 우편물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하다.

전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대에 편지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반가운 사람에게서 오는 편지일리는 만무하고

고지서나 통지서일 테고 국세청이 찍혀 있으면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오늘도 낯선 우편물이 우편함에 머리를 내밀고 삐죽이 나와있다.

이게 뭐지?


과태료 고지서였다.


며칠 전 잠시 딴생각에 잠겨 나도 모르게 학교 앞 해안도로 50km/h 속도 제한 지역을 60km/h로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게 머리를 스친다.

그때 과속 단속 카메라를 보고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아차!' 했다.

도심 도로도 아니고 탁 트인 해안 도로, 좀 떨어져 학교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해안 도로 60km/h 속도 규정을 준수하면서 가다가 맞은 날벼락이었다.


내 차는 모닝 그것도 깡통 밴이다.

가까운 데 타고 다니려고 제일 싼 수동 변속기 스틱 모델을 기본형으로 구매했고

흔한 내비게이션도 달려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차를 몰면서 다른 사람들이 답답하리 만큼 천천히 다닌다.

그것도 2차로나 3차로에서만 운행하며 나보다 빠른 차들을 먼저 보내준다.


내가 평소에 과속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난폭운전은 더더욱 아닌데 평소대로 60km/h를 넘지 않고

단속 카메라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만 잠시 상념에 젖었던 결과가

9만 원이라니

생돈이 나간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착잡하다.


(쫌생이, 언제 대범해질래!)


이런 과태료는 소위 칼치기나 레이싱을 하는 난폭한 범죄자들에게나 가당한 거지

나처럼 얌전히 운전하는 모범 운전자에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난 범죄자가 아니다.

다만 규정을 깜빡하고 9만 원 날벼락을 맞은 피해자인거지.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학교 앞에서 과속한 거 맞네, 잘못했네, 60km/h 찍혔네?, 그럼 과속이지, 뭐가 억울해?" 하고

전후 사정 싹 다 무시하고 나의 억울함은 들어주지도 않겠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억울했을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웃사의 죽음과 의문점


어릴 때부터 듣던 성경 이야기 중에서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는 웃사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웃사가 왜 죽어야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


간략하게 얘기하면 웃사는 하느님의 언약궤를 수레로 나르던 도중 수레가 흔들려 언약궤가 넘어지려고 할 때,

만져서는 안 되는 언약궤를 손으로 붙들었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즉결 심판을 받아 죽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되는데 웃사가 행한 것이 사형에 처할 정도로 악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일로 진노하셨고 웃사가 경외심 없는 행동을 나타내서 여호와께서 그를 치셨다는 성경 기록이 있으니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느끼게 되고,

웃사가 우리는 모르지만 평소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 마음이 악하고 불손한 자였는데

마침 그날의 사건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건

성경에서 알려주는 하느님은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우리에게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권하시는 분이며

매우 자비롭고 사랑 많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웃사가 그것도 예상치 못한 수레의 흔들림으로 언약궤가 넘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그걸 붙들었다고 해서 불쾌하게 여기고 사람을 즉결 심판으로 죽여버린다는 건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Gemini_Generated_Image_cs2befcs2befcs2b.png The Chastisement of Uzzah -J. James Tissot





세키나 빛 (기적의 빛)


그래서 웃사가 왜 죽어야만 했을까? 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분이 맞다.

우리는 영이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순전히 물리적인 면에서만 보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거나 그분을 보고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주는 따뜻함과 밝은 빛으로 우리 모두가 유익을 얻지만 태양에 접근하면 타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느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알려 주며 하느님이 임재해 계신 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게 된다는 경고가 들어 있다.

다마스쿠스에 가던 중에 예수그리스도의 강한 빛을 목격한 사울은 한 동안 시력을 잃게 되었다.


율법에서도 '언약궤를 만진 죄인을 죽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서 만져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알려 준다.

우리는 정확히 빛이 무엇인지 그리고 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이 가진 빛은 그림자도 없으시며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 또는 에너지인 것만은 분명한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그분은 활력 즉 영어 표현으로 '다이내믹한 에너지'가 풍부한 분이시다.


이제 다시 언약궤로 돌아와서 언약궤에는 하느님의 임재를 알리는 신비한 빛인 '세키나 빛'이 항상 언약궤 위의 두 그룹 형상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언약궤는 항상 두꺼운 장막으로 가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상상해 보자.

우리는 세키나 빛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전기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을 설명할 때 발전소의 전기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언약궤는 그 표면에 금으로 입혀져 있었고 고전압의 전기가 흐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그 물건은 접근이 불가한 또는 접촉하면 안 되는 매우 위험한 물건이 된다.


그러면 그러한 고전압이 흐르는 사각의 커다란 물건을 가장 안전하게 옮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물건의 네 귀퉁이의 고리에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不導體)인 나무 막대를 끼워서

네 사람이 안정적으로 들어서 옮기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수레에 싣고 끈으로 결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위험한 운반 방법이 된다.


언약궤.PNG 언약궤



이제 웃사의 사고 당시로 돌아가서

웃사는 수레가 흔들려 궤가 넘어지려고 할 때 언약궤에 손을 짚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것은 부주의로 인한 매우 안타까운 인사 사고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영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언약궤를 만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전기는 아니었겠지만 고전압이 흐르는 위험 물체를 만지면 감전사하듯이 인간에게는 매우 위험한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또 그것을 쳐다보는 것도 매우 치명적인데 실제로 벳세메스에서 5만 70명이 언약궤를 쳐다보고 죽는 일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하느님은 잔인한 살육자가 아니므로 이 경우에도 물리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캡처댄져.PNG 감전 위험 경고




그러면 웃사에게 왜 하느님께서 분노를 터트리셨을까?


만약 여러분이 인솔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위험 시설 견학을 하는데

선생님이 미리 안전 주의사항을 충분히 알려 주었는데도

한 학생이 부주의하게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위험 시설에서 죽는 사고가 생긴다면

여러분은 인솔 교사로서 분노를 터트리게 되지 않을까?




God smote him there for his error; and there he died by the ark of God.
웃사의 실수로 하느님이 그를 치시니 그가 언약궤 옆에서 죽었다.

사무엘하 6:7(표준영어성경)




베레스-웃사


그러면 웃사가 경외심 없는 행동을 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어떻게 봐야 하나?


흥미롭게도 스탠더드 영어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은 그 부분을 웃사가 그의 error로, 그러니까 그의 실수로 죽었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원 히브리어를 조사해 보니,

경외심 없는 행동(irreverence)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히브리어 "샬( שַׁל)"은 '에러', 그러니까 '실수'로도 번역될 수 있고 그 의미는 '예기치 못한 것에서 발생한 것' (of uncertain derivation)을 의미한다.


그래서 웃사가 죽은 것은 그가 매우 악했기 때문이라거나 하느님의 즉결 심판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예기치 않은 사고사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만약에 그가 넘어지는 언약궤를 붙잡지 않아서 언약궤가 뒤집어지고 궤를 덮고 있던 장막이 걷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다른 사람들도 안전에 유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유를 모르더라도 여호와의 지침에 순종할 수 있도록

웃사의 사고를 기록하고 있고

사고가 발생한 그곳을 '베레스-웃사'라고 칭하는데 베레스-웃사의 의미는 "웃사의 위반(違反)"이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히브리어 베레스는 '깨트리다', '돌파하다', '~을 헤치고 나가다', '파괴하다'는 뜻이 있다.


웃사는 안전에 대한 지침을 위반함으로 애석하게 즉사당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영적인 면에서 웃사의 행위는 경건한 두려움의 부족이 맞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부주의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유는 웃사가 사망한 이유가 지침을 어긴 경외심 없는 행동 때문에 받은 심판이라면 언약궤를 지침에 따라 옮기지 않은 관련자들과 책임자들도 이 사건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문제로 더 이상 관련자들을 처벌하셨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웃사 사건 이후 언약궤를 보관하게 된 오벧에돔의 집을 크게 축복하셨다.






웃사는 율법을 위반헸고 나는 속도를 위반했다.

지금까지 웃사를 위한, 아니 아반을 위한 변명이었습니다.

9만 원 고지서는 다음날 바로 납부했다.







제목 이미지: Giulio Quaglio the Younger (1668–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