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인 내가 시골에서 죽는 꿈

by 백종현

표지 by chatgpt



나는 숙련 암살자이다. 나는 "어느 한적한 시골에 숨겨진 기밀을 캐오라"라는 지시를 받는다. 꿈속 논리상 '한적한 시골은 의심을 덜 사기 때문에 정보를 숨기기 좋은 곳'이라는 설정이 있다. 그래서 그 정보를 캐기 위해 내가 파견되는 것.
시골에 도착하니, 수많은 국정원 블랙 요원이 상주중이다. 이것이 '정말로 기밀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내 적이 '국정원'인걸 보아 나는 반국가 쪽 암살자로 추정된다. 나는 국정원 요원을 꽤 많이 죽이지만 결국 패배한다. 그런데 팀장 정도 되어 보이는 인물이 말한다. "너나 나나 소속만 다르지 임무 따라 사는 건 똑같지 않냐. 너를 당장 죽이진 않겠다. 최대한 미루다가, 너를 정말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오면 그때 죽이겠다." 나는 국정원 블랙 팀장의 배려(?) 덕분에 한동안 시골생활을 한다. 임무와 시간 따위는 잊어버리고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을 음미하며.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내 뒤에서 날아온 총알을 맞는다. 그건 국정원 블랙 팀장의 배려이다. 총구를 앞에 들이밀면 내가 번민을 느낄 테니 뒤에서 쏴버린 것. 돌아보니 역시나 팀장은 마음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죽어가면서 시골 노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어르신, 저 오늘 뒈지는 날입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그러자 한 노인이 말한다. "어어 그래. 아이고~~ 정이 들어가지고 이거 너무 섭섭하구먼. 다음 생엔 다른 모습으로 보자고." 이 말에서 '다음 생엔 다른 모습으로 보자'라는 부분은 굉장히 선명하게 들린다.
나는 풀밭에 드러눕는다. 내 몸이 땅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실제로 죽을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은 엄청난 느낌이 몸 전체를 휘감는다. 뭔가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순간 무섭다. 그런데 바로 직후에, 형용할 수 없는 빛무리가 내 몸을 감싸며 나는 마치 '영원'으로 흡수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관찰 및 가설 설정


이 꿈은 구조가 쉽다. 줄거리는 대략 "'나' 안의 암살자적 부분이 죽어서 더 큰 자아로 통합됨"이고 엔딩 연출은 긍정적이고 해방적이다. 이 꿈은 꿈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인 '상태 묘사'에 충실하다. '나'가 덜 암살자적으로 살 수 있게 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꿈에 대한 의식화 작업의 요점은 '암살자'로 대변되고 있는 원리·기능·가치가 무엇인지 느껴보는 것이다. 보편적인 꿈 문법상 암살자는 '경계 설정 / 은밀한 과업 돌파 / 개성화 충동' 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앞선 3화에서 '상징 먼저 끼워 맞춰놓고 구조를 보는 태도'가 얼마나 꿈의 메시지를 왜곡할 수 있는지 살핀 바 있다.

하여, 암살자의 의미는 반드시 '꿈의 객관적 구조'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추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어떤 대상의 의미는 그 대상 자체만으로는 성립되지 않고 그 대상의 '반대항'이 함께 다뤄질 때에만 성립된다. 그래서 꿈은 보통 어떤 한 요소를 제시할 때 그것의 반대항을 함께 제시한다. 하여 암살자의 의미 역시 '암살자의 반대항'을 보면 조금 드러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요소의 의미를 꿈의 객관적 구조에 합치하는 선에서 추론하기'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꿈에서 암살자의 반대항은 일면 '국정원 블랙'이다. 그런데 사실 국정원 블랙은 '시골'과 등가이다. 그들이 시골에 숨겨진 기밀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암살자의 반대항은 시골이다. '시골의 반대항으로써의 암살자'는 무엇을 대변할까?

나는 임무와 시간 따위는 잊어버리고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을 음미하며 지낸다.

꿈 본문에 대놓고 나와있다. 이 꿈에서 시골이란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이고 이는 '임무와 시간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나'의 암살자적 부분"이란 '임무와 시간에 종속된 마음'이다. 임무라고 해서 굳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냥 우리 삶을 생각해 보라. 일상 속에 과업이 늘 있다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과업에 매몰되어서 암살자처럼 비정해진다면 그건 잘못이다. 그러면 모든 걸 '시간'의 맥락에서 보게 된다. 역시나, 시간 속에 산다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을 배제하고 시간만을 산다면 그건 잘못이다.

다소 철학적이라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꿈에서 암살자로 대변되고 있는 원리·기능·가치를 조금 일상적인 말로 풀자면 "지나치게 비정하고 임무 지향적인 태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아마도 '나'는 한동안 그런 태도로 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이제 '나'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게 된 것이다.


암살자의 의미가 어느 정도 파악된 이 시점에서, 꿈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자.


"어느 한적한 시골에 숨겨진 기밀을 캐오라"라는 지시. 꿈속 논리상 '한적한 시골은 의심을 덜 사기 때문에 정보를 숨기기 좋은 곳'이라는 설정.

꿈에 "그 기밀은 이것이었다!"라는 선언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하여 '기밀이 무엇이냐'는 이 꿈의 요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의 엔딩을 알기 때문에 기밀에 나름대로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기밀은 바로 탈암살자적 삶의 가치, 즉 '시골로 대변되는 원리·기능·가치' 자체이다. 그러니 사실은 시골에 기밀이 '숨겨진' 것이 아니라 '시골 자체'가 기밀이다. 우리 현실에서 시골적인 것들—여유 / 느림 / 사치 없이 필요만 충당함 / 자연스러움 / 여백이 많음—이 마치 접속 불가한 (혹은 접속하면 안 되는) 기밀처럼 취급받기 때문이다.


시골에 도착하니, 수많은 국정원 블랙 요원이 상주중이다. 이것이 '정말로 기밀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내 적이 '국정원'인걸 보아 나는 반국가 쪽 암살자로 추정된다. 나는 패배한다.

꿈 맥락상 국정원 블랙 요원이 결코 정치적 포지션이 아님을 우선 인지해야 한다. 국정원은 지금 시골을 지키고 있고, 우리는 이 꿈에서 시골이 무엇을 대변하는지 안다. 아울러 무의식이 '한 사람의 정신세계 총체'를 '하나의 국가'의 형태로 자주 표현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면 좋을 것이다. 이걸 반영하면 국정원은 "'나'의 정신세계 속 시골적인 부분을 지키는 에너지"로 읽힌다. 그런데 또 그냥 국정원이 아니라 국정원 '블랙'이다. 정보전이나 사무놀음이 아니라 '무력 방어'를 뛰는 에너지. 암살자인 '나'가 국정원 블랙에게 지는 이유는 굳이 자세히 다루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암살자적 삶의 태도가 시골이 대변하는 가치에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렇다.


팀장 : 너나 나나 소속만 다르지 임무 따라 사는 건 똑같지 않냐. 너를 당장 죽이진 않겠다. 최대한 미루다가, 너를 정말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오면 그때 죽이겠다.
팀장은 '나'가 시골 생활을 충분히 만끽한 이후에, '나'가 번민을 느끼지 않도록 뒤에서 총을 쏴 죽임

"소속만 다르지 임무 따라 사는 건 똑같지 않냐"라는 것은 마치 한 내면 인격이 또 다른 내면 인격에게 "우리가 접근법만 서로 다를 뿐 '총체로써의 나(Self)'를 위해서 사는 건 똑같지 않냐"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적대나 반목보다는 조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죽이는 걸 미뤄주는 이유는 역시나 암살자가 시골 생활 맛을 보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이미 이 꿈의 목적이 어떤 요소를 '단순 제거'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나 : 어르신, 저 오늘 뒈지는 날입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노인 : 어어 그래. 아이고~~ 정이 들어가지고 이거 너무 섭섭하구먼. 다음 생엔 다른 모습으로 보자고.
'다음 생엔 다른 모습으로 보자'라는 부분이 선명함. 즉 꿈의 힘점임

'나'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막상 시골 생활을 해보니 암살자적 삶의 태도가 꽤 부자연스럽고 불균형한 태도였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시골 노인은 '세넥스Senex 원형'으로 읽힌다. 노인이 "다음 생엔 다른 모습으로 보자"라는 관용어구를 사용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이건 단순한 '노인이 할법한 윤회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정말로 "암살자적 태도가 아니라 다른 태도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너'를 보고 싶다"이다.


나는 풀밭에 드러눕는다. 내 몸이 땅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실제로 죽을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은 엄청난 느낌이 몸 전체를 휘감는다. 뭔가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순간 무섭다. 그런데 바로 직후에, 형용할 수 없는 빛무리가 내 몸을 감싸며 나는 마치 '영원'으로 흡수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상징적 죽음'의 장면이다. 요약하지 않고 일부러 본문을 그대로 다시 적었다. 한 부분 한 부분이 다 주옥같기 때문이다. 한 부분에 다섯 문장씩 할애해서 분석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간단히 정리하면,

풀밭에 드러누움 : '나'가 눕는 곳이 이제는 '임무적, 시간적 바탕'이 아니라 '유기적 생기의 바탕'임

땅으로 가라앉는 듯한 압도적인 느낌 : '대양감(ocean-feel)'이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이 부분은 '대지감'으로 읽힘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순간 무서움 : '존재의 재편성'은 부분적으로 상실처럼 느껴지기 때문

빛무리가 감싸는, 영원으로 흡수되는 느낌 : 존재 재편성 과정에서 상실의 느낌이 지나가자 통일감(본질)이 느껴짐

이 파트를 근거로, 우리는 '암살자—나'가 단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의 말대로 "다음 생엔 다른 모습"이기 위해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통합이다. 이 꿈은 단순하게 "암살자처럼 살지 마!"라고 하지 않는다. 시골적 가치에 접속하지 못하는 암살자가 결국 시골과 조화를 이루어 그 안으로 통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짧은 보충


이 꿈에서 암살자로서의 '나'가 죽었다 하더라도 꿈꾼 '나'가 다시는 '암살자 꿈'을 꾸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건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한다.

같은 암살자여도 꿈 전후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자세히 다루고 싶은 부분은 첫 번째 항목보다는 두 번째 항목이다. 꿈 분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만약 오늘 다룬 꿈을 꾸고 나서 얼마 후에 또 암살자가 된다면, "아… 저번에 통합했는데 지금 다시 퇴행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진 않다. 만약 그가 오늘의 꿈을 충분히 의식화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 꿈의 암살자-나는 다른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 경우의 암살자-나는 가설 설정 초입부에 다뤘던 '경계 설정 / 은밀한 과업 돌파 / 개성화 충동' 등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꿈 맥락으로 유추해야 한다.

오늘 다룬 꿈을 포함하여 무의식 영상에서 나타나는 '상징적 죽음'은 대부분 '제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통합'에 대한 것이다. 통합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여, 새로운 꿈에서 또 암살자인 당신은 같은 암살자의 모습이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할 가능성이 높다.




정리


나의 비정하고 임무수행적인 태도—암살자로서의 나—로 인해 나는 탈시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시골—의 가치에 '기밀을 캐는 목적'으로는 접속하지 못한다. 내 안에 그 가치를 수호하는 또 다른 부분—국정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내면의 국정원은 내 내면의 암살자를 단순 제거 하지 않고, 대신 시골의 가치에 진정으로 접속해 볼 시간과 기회를 준다. 그 결과 나의 암살자적 부분은 시골의 가치·기능·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이어서 상징적 죽음이 찾아오고, 암살자로서의 나는 과거의 비정하고 시간적인 바탕에서 빠져나와 유기적이고 생기 있는 영원의 바탕에 누워, 통합된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