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현명한 암살자가 된 꿈

by 백종현

표지 by chatgpt



내가 누군가와 함께 지하철 역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우리 둘 다 암살자라는 설정이다. 역은 아주 크다. 광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직전에, 동행 암살자가 나를 손짓으로 멈춰 세우더니 CCTV스크린을 가리킨다. 스크린에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든 사람이 다 찍히고 있다. 우리는 암살자이므로 CCTV에 노출되어선 안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그가 나를 멈춰 세운 것. 곧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아주 간단한 조치로 이 난관을 파훼한다. 에스컬레이터의 한쪽 면에 아주 바짝 붙은 것이다. 나도 그것을 따라 한다. 그러자 우리는 CCTV에 포착되지 않는다. CCTV에 포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저 감지 시스템도 다 피해 간다.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야. 역시 같은 암살자라도 군 출신은 다르군. 나는 거리 출신이라 이런 테크닉은 없어.” 그러자 그가 말한다. “너는 왜 네 약점을 말하는 거지? 네가 거리 출신이라면 군 출신인 나보다 약할 테고, 내가 그걸 알면 널 죽일 수도 있는데?” 나는 대답한다. “글쎄 네가 웬만하면 날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네가 착해서건, 나를 죽여 얻을 이득이 없어서건 말이야. 만약 네가 날 죽인다 한들 그냥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이쯤에 우리는 역 광장에 내려와 있다) 군 출신 암살자는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내 멱살을 잡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정말 웃긴 소리군. 나는 네가 ‘도덕적이고 멋있어 보이는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방금 한 말을 'A'dam(나)이 아니라 ‘D'an(타인)이 했다고 생각해 봐. 어떻게 들릴지 말이야.” 나는 멱살이 잡혔는데도 어쩐지 긴장도 하지 않고 겁도 나지 않는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보편적인 ‘인간 심리’를 말하고 있고, 나 또한 그런 ‘도덕 연출’을 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근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나는 확실히 도덕 연출을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달리 복잡하게 항변하지 않고 그저 “음,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을 수 있지”라고 간단하게만 대답한다. 그러자 어느새 내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은 사라져 있고 그도 말을 잇지 않는다.


지난화에 이어서 또 다른 '암살자꿈'을 다루려고 한다. 두 꿈은 같은 사람이 꽤 시간차를 두고 꾼 것이다. 지난화에서 나는 "암살자로서의 자기가 죽고 통합되는 꿈을 꾼 사람이 충분히 또 암살자 꿈을 꿀 수 있으며, 그 이유는 퇴행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마 같은 암살자여도 완전히 다른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의 꿈이 바로 그런 예시이다.




관찰 및 가설 설정


암살자인 '나'와 일행이 지하철 역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은 어떤 '공적 이동(대중교통 이동)'을 한 턴 마치고 난 이후인 것 같다. ‘역 광장’은 당연히 집단적/사회적 영역이다.

에스컬레이터 부근에서 CCTV와 레이저 등의 '감시 설정'이 등장한다. CCTV는 감시 수단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평가/기록/증거화, 즉 ‘나중에 문제 삼을 수 있음’의 수단이다. 레이저 감지 시스템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례 / 분위기 / 암묵적 규칙 쪽으로 보인다. CCTV와 레이저라는 두 요소를 보아하니 마치 두 암살자가 ‘카르텔 돌파’를 앞두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꿈은 카르텔을 통과하는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난 화에 다뤘던 "암살자는 꿈 맥락에 따라 개성화 에너지를 상징할 수도 있다"가 떠오른다. 무의식은 개성화 에너지를 암살자, 일탈 청소년, 코미디 범죄자 류의 상징으로 표현할 때가 종종 있다. 왜냐면 그것들이 모두 '선입견·체계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추동하는 무엇'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다른 암살자’가 되었다.

꿈이 제시한 파훼법이 아주 간단하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그냥 '벽에 착 붙으면' 된다. 대단한 전략도, 대단한 정체성 타협도 필요 없다. '벽에 붙기'를 현실 행동으로 번역하면 '나의 노출면을 최소화하기' 정도 될 것이다. 여러 집단생활을 많이 해 본 분들은 그저 자기 노출을 덜 한 것만으로 쓸데없는 간섭을 덜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나 : 역시 군 출신은 다르구먼. 나는 거리 출신이라 이런 테크닉은 없어.
군 암살자 : 너는 왜 네 약점을 말하는 거지? 내가 널 죽일 수도 있는데?
나 : 네가 웬만하면 날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군 암살자 : 너는 ‘도덕적이고 멋있어 보이는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얘기하고 있군
나 : (상대방 말의 보편타당성과 자신의 본심을 차분히 검토한 후) 뭐...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

'나'가 앞선 장면에선 '벽에 붙기-노출하지 않기'를 택한 반면 이 장면에서는 '스스로 약점을 노출하기'를 택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나'가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자신의 약점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타인과 친밀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꿈의 연출을 보아하니, ‘나’의 이런 관계 맺는 방식은

건강한 층위 : 신뢰를 전제한 솔직함. 관계 단순화

위험한 층위 : 상대가 보았을 때 “도덕 연출”로 해석될 여지

를 모두 갖고 있다. 하여 꿈이 이 둘 사이의 균형 지점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거리 출신 암살자'는 탈규범적/비정형적 돌파 에너지, '군 출신 암살자'는 규범적/정형적 돌파 에너지라는 간단한 정리를 먼저 한 후 살펴보자. 군 출신이 ’카르텔‘ 편인 건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거리 출신, 군 출신은 서로 일행이다. 이렇게 보면 둘 모두 ‘나’의 내면인격처럼 보인다. 여기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까지 합하면 군 출신의 정체는 도덕적 초자아(super-ego) 계열로 좁혀진다. 정리하면 이 장면은, ‘나’가 약점을 노출하며 타인과 관계 맺으려 할 때 내면의 초자아 혹은 검열적 타인에게서 오는 “너 그거 멋있어 보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에 대응하는 장면이다.

앞서 ‘카르텔 통과’의 해법도 간단했듯이 ‘초자아 및 검열적 타인에 대한 해법’도 간단하다. 초자아 혹은 검열적 타인이 “너 멋있어 보이려는 거지? “라고 할 때 ”아니!! 난 순수해!!“라고 하면 에너지 다 빨린다. "음,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을 수 있지"가 바로 전형적인 '에너지 빼앗기지 않기', 약간 도식적으로 말해서 굉장히 고급인 심리 기술이다. '나'는 논박하지 않는다. '나'는 발끈하지 않는다. '나'가 그럴 수 있는 건 상대방의 말을 '공격'으로 환원하기 전에, 그 말을 객관적 층위에서 먼저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상대방이 지시하고 있는 것과 자기 자신을 섣불리 동일시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말과 상대방 자체 또한 동일시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동일시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스스로 멋있어 보이는 것'에 정말로 관심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군 출신이 멱살을 잡고 비웃어도 겁이 나지 않으며, 군 출신의 말은 멈추고 멱살 잡은 손은 풀린다.




보충


1.

꿈 전반부의 내용을 통해서 살펴봤듯이, 꿈꾼 ‘나’는 아마 자기 실력보다 노출, 규범, 평가 프레임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장(카르텔)에 입성하기 직전인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꿈이 전반부의 ‘카르텔 통과’ 과제와 후반부의 ‘초자아 or 대인 관계’ 과제를 엮어서 표현했다는 점이다. 둘이 본질적으로 같은 해법을 공유하는 문제이기 때문.

상대가 카르텔 장이건 초자아/검열적 타인이건, 간단히 ‘노출 최소화’만으로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다. ex) 너무 깊은 본질은 완화해서 말하기

상대가 카르텔 장이건 초자아/검열적 타인이건, ‘논쟁’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구먼 “이 ‘나’의 에너지를 보존하고 상대를 무력화시킨다. ex) 카르텔 : 다 너무 현학적인 거 아니에요? -> 그럴 수도 있겠네요. ex2) 초자아/타인 : 너 멋있어 보이려는 거지? -> 그럴 수도 있겠네.


2.

오늘의 핵심 주제를 다룰 차례. 지난 화의 ‘암살자-나‘와 이번화의 ’암살자-나‘의 차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지난화 ‘나’가 목표로 했던 것은 ’탈취‘. 이번화 ’나‘의 목표는 ‘통과’

지난화 ’나‘는 대상을 섬멸하려 함. 이번화 ‘나’는 일행에겐 허심탄회하게 약점을 노출함

지난화 ‘나’가 사용했던 수단은 ‘무력’. 이번화 ‘나’가 사용한 수단은 ’벽에 붙기 및 논쟁에 안 휩쓸리기‘

‘나’가 굉장히 달라진 것이 보인다. 지난화의 암살자-나가 자신의 어떤 점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이번화의 암살자-나가 보이는 여러 행동이 그 해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느껴질 것이다. ’나‘가 자신을 시간규범·비정함·임무강박으로부터 해방시키자 오히려 사고가 명료해졌고, 지금은 그 명료한 사고를 바탕으로 개성화를 향한 전략적 접근이 이루어진다. ’노출 최소화‘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카르텔을 통과하고, ’비동일시‘로 초자아/검열적 타인을 무력화하는 ‘나’는 이제 삶 속에서 쓸데없이 소모당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에너지 소모가 적으니 ‘나’의 돌파는 이전보다 더 효과적이리라.


이로써, 우리는 한 사람이 꾼 두 다른 ‘암살자꿈’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정리

나는 관례, 암묵적 룰, 평가 프레임이 지배하는 공적 장을 앞두고 있다. 나는 그런 선입견과 체계를 통과하여 내 고유의 목적을 향해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검열적 장을 ‘나의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통과한다.
나는 ’장field’ 뿐만 아니라 ’검열적 기능을 발휘하는 타인과 내 안의 도덕적 초자아‘에 대한 적절한 대응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런 대상들에게 조금은 쉽게 약점을 노출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대상들이 ‘현학성/허영심’ 논쟁을 걸어올 때, 그 논쟁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 인식 / 비동일시‘를 통해서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다.
하여, 나는 이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개성화를 향해 간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