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에 교회를 바라보는 꿈

by 백종현

표지 by chatgpt



밤. 설원. 나는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구교이면서도 신교처럼도 보이는 어떤 교회가 있다. 꽤 크다. 각지의 평신도들을 담은 듯한 셔틀버스 여러 대가 그곳에 도착한다. 곧 전례(예배) 시간인가 보다.
어느새, 언덕 위에 있는 내 옆에 홀쭉한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오셔서 말씀하신다. “날도 추운데 셔틀버스 타고 오시지 왜 걸어오셨어요” 젊은 내게 존대를 하시는 점잖은 분이다. 아마 내가 교회 소속인 줄 아시는 것 같다. 나는 “아, 어르신 저는 그냥 거니는 중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분은 ‘거닌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듯 “아~ 거니는 중이셨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어르신은 "여기서 저쪽(교회 쪽 말고)으로 쭉 나가면 인간 극장이 있대요"라고도 하신다. 본인은 신도이신 것 같은데, 내가 신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도 전도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피해 가는 산책코스를 제안하시는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어르신 혹시… 인간 극장이라는 게 티비 프로그램을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면 우리 사람들 사는 모양이 다 하나의 극 같다는 것을 말씀하신 건가요?"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며, 굉장히 기뻐하며 말씀하신다. “아!! 이 분은 말이 통하는 분이시네!!” 내 질문 자체가 '뭔가를 알아들었어야만 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뜻이다. 어르신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


요 근래 아이를 통해서 교훈이 드러나는 꿈을 많이 다뤘으니 이번 화엔 노인을 통해서 교훈이 드러나는 꿈을 다뤄보자. (무의식의 메시지에 나타나는 노인-현자 원형을 보통 세넥스Senex라고 부른다) 모든 한 인간 안에는 신성한 아이도, 지혜로운 노인도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우리를 도와줄 의향이 있는 ‘내면 인격’들이 참 많다.




관찰 및 가설 설정


-밤. 설원. ‘나’는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봄
-구교+신교처럼 보이는 교회가 있음
-셔틀버스 여러 대가 그곳에 도착함

밤의 설원이라는 고요한 사색적 배경. '구교이자 신교처럼 보이는 교회'는 통합적 그리스도교 관점인 '에큐메니칼'을 떠올리게 한다. '나'가 언덕 위에서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 소속된 상태는 아니다. 하여 여기서 꿈꾼 사람이 '구교·신교 신학을 두루 공부한 에큐메니칼리스트이면서도 제도로써의 교회는 거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밝히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면 이 꿈이 '나'의 그런 독자적인 관점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셔틀버스 여러 대가 우르르 들어온다. 이 셔틀버스는 맥락상

종교—제도의 보편성(장점) : ‘누구나 언제나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전례’를 보장하는 수단

종교—제도의 집단성(단점) : ‘단독자(키르케고르 참조)적 가치’와 '내 발로 걷는 기도'를 배제하는 수단

과 같이 양가적으로 읽힌다. 즉 '나'는 종교—제도의 가치와 위험을 두루 살피고 있는 중이다.


노인 : 날도 추운데 셔틀버스 타고 오시지 왜 걸어오셨어요
나: 아 어르신 저는 그냥 거니는 중이었습니다
노인 : 아~ 거니는 중이셨구나~ 여기서 저쪽으로 쭉 나가면 인간 극장이 있대요
나 : 말씀하신 인간 극장이 티비 프로그램인가요 아니면 우리 사람들 사는 모양이 다 하나의 극 같다는 건가요?
노인 : 아!! 이 분은 말이 통하는 분이시네!!
노인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림. 즉 꿈의 ‘힘점’임

'젊은 내게 존대를 하시는 점잖은 분'이라는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노인—세넥스 원형—이 '권위적/수직적 지혜'가 아니라 '수평적 지혜'를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인은 ‘나’의 '거닐기'를 이해한다. '거닐기'는 상징적으로 역시나 이 꿈의 핵심 정조인 '거리를 둔 관찰, 관조, 독자적 사색' 등을 뒷받침한다. 노인이 '거닐기'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건 그의 목적이 전도—합류 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루guru는 무작정 내 흐름에 합류하라고 하지 않고 ‘제자에게 딱 맞는 것’을 제시한다. 이 경우 인간 극장이 그것이다. 이 꿈의 인간 극장은 맥락상 다음과 같이 읽힌다.

메타 시점적 삶의 태도 : “사람 사는 모양이 다 극 같다”라는 태도

세속 친화적 영성 추구 방식 : 신비·초월을 제도적 종교 가치 안에서 찾기보다는 사람 사는 모양 속에서 찾는 것

두 의미 다 정합적이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세속 친화적 영성 추구 방식'이 인간 극장의 의미로써 특히 더 정합적이다. 왜냐하면 이 꿈이 '나'와 '종교—제도' 사이를 다루고 있음이 배경에서부터 밝혀졌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노인은 '나'에게 "종교—제도에 소속되지 않고 거니는 당신의 여정은 정당합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종교—제도의 바깥쪽 '사람 사는 모양' 속에서 신비를 찾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꿈의 compensation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 꿈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가 인간 극장의 의미를 묻자 노인이 말한다. “아!! 이 분은 말이 통하는 분이시네!!” '나'와 세넥스가 상징으로 묻고 상징으로 답하는 상호이해의 장면—사실은 이것이 이 꿈의 핵심 compensation이다. 꿈에서 내면 인격과 서로 이해를 주고받았다면 그건 당신이 당신의 한 부분과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우리는 '나'가 인간 극장을 향한 여정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인정하며 잘 나아가리라 짐작할 수 있다.




보충 · 심화


칼 융은 한 사람의 개성화를 논할 때 일반론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상황과 형편이 다르며, 필요한 덕목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런이런 행동을 하고 이런이런 가치관을 지향하면 개성화된다’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거다. 한 가치가 있어도 어떤 사람에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이롭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퇴행일 수 있다.

하여 중요한 것은 이 꿈을 두고 "아! 종교—제도에 소속되는 것은 사람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꿈이 말하고 있구나!"라는 식으로 오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절대로 그런 일반론을 말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고유한 ‘나’에게 고유한 무엇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종교—제도에 소속된 A가 있다. A는 사실 종교심을 느껴본 적이 없고 그저 관성/타성에 의해서 종교—제도에 소속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좋은 습관’의 이점을 누리지도 않는다. 이 경우 어쩌면 A의 에너지 일부가 낭비되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무의식은 A에게 오늘 우리가 다룬 꿈과 비슷한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A가 타고난 종교심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의지로 종교—제도에 소속되었으며, 하여 그런 상태가 A의 에너지를 잘 순환시킨다면, 무의식은 절대로 A에게 종교—제도를 버리라고 조언하지 않는다. 이 예는 매우 단순화한 것이고 현실에는 훨씬 복잡한 사정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평생을 헌신한 사제나 목회자가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탈교할 수도 있고, 웬 깡패나 사회주의자가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제가 될 수도 있다. 둘 다 흔히 있는 일이다.

이 꿈이 ‘나’에게 종교—제도의 대안으로써 ‘인간극장’을 조언한 이유는 순전히 그것이 ’나‘라는 사람에 한해서 에너지를 잘 순환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나’가 구교·신교 신학을 두루 공부한 에큐메니칼리스트이면서도 교회는 거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살핀 바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형식이 내용을 망치는 것’을 가장 참지 못하며, “고귀한 가치도 막상 여러 사람이 다루기 시작하면 이상해진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꿈을 꾼 ‘나’는 그런 성향으로 인해 에큐메니칼리스트이면서 교회는 안 다니는, 즉 "이쪽도 저쪽도 아닌 놈"이라는 평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꿈이 왜 “아!! 이 분은 말이 통하는 분이시네!!”라는 말을 핵심 compensation으로 제공했는지 알 수 있다. 혼자 걸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혼자 걷는 길이 외롭지 않을 순 없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에겐 "내 말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구나" 하는 경험이 절실하다.




정리 · 적용


나는 나만의 고요한 사색 속에서, 내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통합적 종교—제도의 모습을 관조한다. 나는 거리를 둔 채 그 종교—제도의 보편성이 주는 장점과 집단성이 주는 위험을 두루 파악한다. 이어서 나는 내 안의 현자적 지혜와 대화한다. 그는 권위적 지혜가 아니라 존중하는 지혜로써, 나의 '거닐기'가 '집단적/제도적 신앙 여정'의 대안일 수 있음을 부드럽게 이해해 준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게 새로운 가치—메타 시점적 삶의 태도와 세속 친화적 영성 추구 방식—을 넌지시 제시한다. 나는 그와 상징으로 묻고 상징으로 답하며, 이해하고 이해받는다.

∴ 나는 종교—제도 대신 '사람 사는 모양' 속에서 신비를 찾는 나의 여정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인정하며 계속해나갈 것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