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에서 두리안이 개봉되는 꿈

by 백종현

표지 by chatgpt


Scene 1
흰 배경의 무도회장이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여자 파트너가 있다. 곧, "모든 남자는 자기 여자파트너를 치우라"는 지시가 어딘가에서 설정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다 그렇게 한다. 그러나 나는 내 여자 파트너와 쭉 함께한다.
잠시 후, 저쪽에서 누가 포장되어 있던 두리안을 개봉한다. 사람들은 "크아악! 역시 두리안 냄새는 고약해!"라는 듯이 혼비백산한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뭐, 그냥 두리안 냄새네" 하고 담담히 생각한다. 내겐 오히려 향긋한 냄새이다.

Scene 2
나는 앞서 있었던 '무도회장 사건'을 돌아본다. 나는 내가 여자파트너를 치우지 않았던 것이 혹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곧, 나는 여자와 내가 바닥에 그려진 어떤 원 안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그것에 근거하여 "잘못이 아니구나!" 깨닫는다. 이어서 나는 두리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는 "두리안은 과일의 왕"이라고 떠올린다.




관찰 및 가설 설정

"어떤 규범적 분위기 속에서 '나'의 반응은 어떻고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내용이 꿈 자체에 다 주어져 있다. 이런 류의 꿈은 아주 교훈적이면서도, 해석이 용이해서 교훈의 습득까지도 쉽다.


'흰 배경의 무도회장'은 '사회 의례, 규범의 장'으로 쉽게 읽힌다. 유럽 고전 소설, 특히나 사교계 묘사가 많은 소설을 생각해 보라. 그 이야기에서 무도회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규범의 장에 "여자 파트너를 치우라"는 지시가 발동한다. 여자 파트너가 상징적으로 무엇이길래 규범의 장은 그녀를 치우라고 하는 걸까? 꿈이 여자 파트너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의미 덩어리'로 놓은 것을 보면 확실히 특정 인물, 특정 기능이 아니라 여성적 기능/가치의 '일반'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여성적'이란 말은 성별 본질이 아니라 심리의 원초적 작동 양상을 일컫는다) 따라서 '여자 파트너'의 의미로써 포용·돌봄·에로스(관계맺는 에너지)·감수성·창조·잉태 등 보편적인 것들을 쭉 펼쳐놓고 후속 내용에 따라 조심스럽게 좁혀야 한다. '여자 파트너'에 대해서 당장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이다. 다만 "여자 파트너를 치우라"는 지시가 "너는 여성적 기능/가치 일반을 배제하라. 혹은 그것과 분리되어라"라는 뜻임은 당장 알 수 있다. '여자 파트너'가 그런 것처럼 이 지시에도 모습이 없다. 따라서 이 지시는 '개별 가해자가 휘두르는 구체적인 강요'보다는 '환경 전반에 작용하는 subtle atmosphere', 즉 '장(場)의 분위기 명령' 쪽으로 봐야 한다.


누가 포장되어 있던 두리안을 개봉한다. 사람들은 “크아악! 역시 두리안 냄새는 고약해!”라는 듯이 혼비백산한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뭐, 그냥 두리안 냄새네” 하고 담담히 생각한다. 내겐 오히려 향긋한 냄새이다.

본격적으로 '나'의 반응이 나타나는 지점이고, 그러므로 당연히 이 지점에서부터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여자를 치워라"라는 명령에 '나'는 불순응 하고, "두리안은 고약해!"라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난 향긋한데?"라고 하고 있다. 둘 다, "'나'가 대중과 다른 반응을 하는 모습"이다. 이는 꿈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같은 메시지를 다른 재료로 반복하기―이다. 하여, '여자'와 '두리안'이 유사등가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제 우리는 두리안이 이 맥락에서 무엇인지를 살핌으로써 앞서 다루다 말았던 '여자 파트너'의 의미도 조금 좁힐 수 있다.

두리안은 냄새가 고약하다. 냄새가 고약하다는 건 두리안의 '결함'이 아니라 '특징'이다. 그런데 이 특징이 무도회적 관점—사회 의례 및 규범의 관점—에서는 '결함'이다. 꿈속 대중의 반응은 그것에 맞춰져 있다. 이걸 '여자 파트너'에 대입해 보면 동형구조가 드러난다. '여자 파트너'는 (상징적으로) 포용하고, 돌보며, 감수성이 풍부하다. 이것은 '여자 파트너'의 '결함'이 아니라 '특징'이다. 그런데 이 특징이 사회적 의례 및 규범의 관점에서는 '결함'이다. 왜 결함일까? 우린 이미 알고 있다. 현실의 ’무도회스러운’ 장들―규범적이면서도 특히나 경쟁·위계의 암시가 강한 장들―이 자주 '포용하고 돌보는 감성적인 태도'를 '유약함·의존성·취약성·미성숙'등으로 치부한다는 걸. 이것이 바로 무도회에 '여자 파트너를 치우라'는 지시가 발동한 이유이다.


나는 앞서 있었던 '무도회장 사건'을 돌아본다. 나는 내가 여자파트너를 치우지 않았던 것이 혹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곧, 나는 여자와 내가 바닥에 그려진 어떤 원 안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그것에 근거하여 "잘못이 아니구나!" 깨닫는다.

이 부분이 꿈의 백미이다. 만약 꿈에 이 부분이 없었다면 이 꿈은 교훈이 되기 전에 '반항을 자랑하는 서사'에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나?"라는 '나'의 복기를 꿈 맥락에 따라 조금만 더 자세히 서술한다면, "내가 '포용하고 돌보는 감성적인 태도'를 나에게서 분리하지 않은 것은 혹시 내 유약함·의존성·취약성·미성숙의 반증인가?"이다. '나'의 자기 점검 기능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꿈속의 '나'는 '원'을 근거로 해서 "잘못하지 않았다"라고 결론 내린다. 여기에 해석상의 함정―꿈 자체의 함정이 아니라 해석상의 함정―이 있다. 같은 '원' 상징이라도 문맥에 따라,

'어머니에게 포획되어, 벗어날 수 없는 마법의 원에 갇히는 근친상간적 퇴행'의 상징일 수도 있고, (칼 융 참조)

'자기(self)·온전함(wholeness)'의 상징일 수 있다.

이 꿈은 정동과 결말이 "아, 알겠다! 잘못이 아니구나!"라는 '해결감 및 자기 인정'으로 수렴하므로, 후자의 의미가 강해진다. 하여, '나'가 "'내가 여자와 원 안에 함께 있었던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린 것은 곧,

규범의 장은 '포용하고 돌보는 감성적인 태도'를 유약함·의존성·취약성으로 치부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들 그것들은 내 전체의 일부이다.

라고 '나'가 깨달은 것과 같다.


'두리안'을 살짝만 더 살펴보자. '나'가 두리안을 '왕'으로 명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두리안도 엄연히 과일이지"라고만 해도 이 꿈의 핵심 메시지가 충분히 성립하는데, '나'는 굳이 '왕'이라는 상위개념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인간 정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상징체계인 '연금술'식으로 독해하면 잘 맞는다. 연금술은 '납(가장 추한 것)'으로 '금(가장 귀한 것)'을 만든다. 좀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연금술에서 가장 추한 것과 가장 귀한 것은 서로 같다. 가장 냄새나는 과일(두리안)이 바로 과일의 왕인 것. 이런 독해를 적용한다면, '나'는 "유약하다고/악취가 난다고 치부되는 것들을 배제하지 않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그 통합을 통해서 어떤 '왕'이 이루어진다"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연금술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칼 융의 '융합의 신비'를 참고하길 바란다.)



보충 - 개인사 반영


1. 주가설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적 기능/가치'를 '포용, 돌봄, 감수성'쪽으로 좁히긴 했지만, 꿈에서 '여성 원형'으로 자주 표상되는 '창조 에너지(뮤즈)'도 가설 요소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나 이 꿈을 꾼 사람이 예술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여 '뮤즈 가설'을 보조 가설로써 적용한다면 이 꿈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경쟁과 위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장이 '나'에게 '창조 에너지(예술혼)'와 분리될 것을 강요함. 사회의 입장에서는 예술혼과 같은 감수성/태도가 인간의 결함이기 때문. 그러나 '나'는 거부함. 나머지 내용은 동일.

'주요 방점'에 있어서 기존 가설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존 가설과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


2. 문학적 독해를 살짝 버무리는 것도 가능하다. 무도회장은 춤을 추는 곳. 그런데 그런 곳에서 파트너를 치운다면 도대체 누구와 춤을 추는가? 이 꿈의 무도회는 춤 자체를 금지하진 않지만 "함께 춤출 ‘내면의 타자적 속성’을 금지"한다. 그에 응한다면 남는 것은 그저 '규율의 퍼포먼스'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나'의 불순응을 본다면, 무도회가 무도회이긴 위한 최소 조건을 지키는 행동처럼 보인다.



정리 · 적용

사회적 의례, 규범의 장이 '포용·돌봄·감수성' 등의 가치를 '유약함·의존성·취약성'으로 국한하고, 그것들을 나에게서 분리하라고 은근히 지시한다. 그러나 나는 그에 응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유약함·의존성·취약성까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 나의 이런 면이 바람직하지 않은지(퇴행적인지)도 검토해 본다. 검토 결과, 나는 내가 '전체성'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퇴행과는 차이가 있음을—발견한다. 그 덕에 나는 사람들이 결함이 있다고(악취가 난다고)하는 것을 두고도 '왕'이라 부를 수 있다. 통합 여정에선 가장 추한 것과 가장 고귀한 것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