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를 피하다가 뱀에게 묶이는 꿈

by 백종현

표지 by chatgpt


내가 첩첩산중에 있다. 산 전체가 조금도 어두운 구석 없이 엄청나게 밝고 하얗다. 백야이다.
저쪽에 사자 여러 마리가 있다. 암컷 수컷 섞여있다. 나는 사자들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저들이 보인다는 건 저들도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저들이 날 보는 순간 난 죽는다." 그래서 나는 사자 무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산을 '오른다'. 산을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산봉우리(정상)에 도달해야 사자 무리가 나를 잡을 수 없게 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던 중 무언가가 내 양쪽 다리를,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휘감아 붙잡는다. 곧이어 허벅지에서 쪽쪽 빨리는 듯한 느낌이 뜬다. 나를 휘감은 것이 아마도 뱀-거머리인가 보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꿈에서 깨는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한 후 꿈에서 깨어난다.



관찰 및 가설 설정


꿈이 오래된 상징들(산, 사자, 뱀 등)을 조금은 현대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느 꿈이나 그렇지만 이 꿈은 특히나 "사자=힘, 뱀=지혜"라는 식의 '조립식 해몽'을 할 경우 의미가 완전히 왜곡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더욱 꿈의 '객관적 구조'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여, 이 꿈은 핵심 사건의 의미를 먼저 파악한 이후에 나머지 요소들을 살펴보는 순서가 맞을 것 같다.


나는 사자들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저들이 보인다는 건 저들도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저들이 날 보는 순간 난 죽는다." 그래서 나는 사자 무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산을 '오른다'. 산을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산봉우리(정상)에 도달해야 사자 무리가 나를 잡을 수 없게 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자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자를 위협으로 느끼는 것"이 '꿈의 사실'이다. '동물의 왕'이라는 연상만 가지고 이 꿈에서의 사자를 왕의 자질, 군림하는 힘, 강력하고 멋진 본능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꿈은 '사자'를 그렇게 보라는 암시를 어떤 식으로도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확실한 사자의 의미는 '위협'이다.

지금 당장 확실한 또 다른 '꿈의 사실'은 무엇인가? '나'가 사자를 피하려고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있다. 즉, '나'는 자신이 사자보다 '높아지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산을 오르던 중 무언가가 내 양쪽 다리를,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휘감아 붙잡는다. 곧이어 허벅지에서 쪽쪽 빨리는 듯한 느낌이 뜬다. 나를 휘감은 것이 아마도 뱀-거머리인가 보다.

마찬가지다. '뱀-거머리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내 다리가 묶인다"와 "내가 쪽쪽 빨린다"가 꿈의 사실이다. 역시나 '뱀은 지혜/영웅'이라는 단순한 맵핑이 왜 의미가 없는지 보이는 대목이다. 꿈 문법상 "다리가 휘감기는 것"은 '나아가는 힘(기동력)의 봉쇄'로 쉽게 읽을 수 있고(특히나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완전히 묶였다면 '원천봉쇄'이다) "쪽쪽 빨리는 것"은 말 그대로 '에너지를 뺏기는 것(소모/흡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왜 '나'는 기동력이 봉쇄되고 쪽쪽 빨리는가? 산을 '올랐기' 때문이다. '위협보다 높아짐으로써' 위협을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꿈이 '높아지려 함'의 의미를 '잘나지려 함'과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남보다 잘나지려는 시도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그런 '비교하고 경쟁하는 태도'는 사람이 진정한 자신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에너지를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소모시킨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꿈에서 깨는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한 후 꿈에서 깨어난다.

기동력이 봉쇄되고 에너지가 쪽쪽 빨리는 상황에서, '나'는 문제 직시/해결 대신 '상황 자체를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꿈의 핵심 사건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숙고해 보았다. 이 시점에서야 앞으로 돌아가 요소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꿈의 배경은 '조금도 어두운 구석 없이 엄청나게 밝고 하얀 첩첩산중'이다. 우리는 꿈의 핵심 사건을 파악했기 때문에, 이런 배경이 '거룩/신비'를 암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백야이다."라는 텍스트가 함축적이고 정확하다. 어둠·휴지기 없이 지속되는 의식. 이 꿈의 배경은 '나'의 '과의식'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에 '산'이 꿈 문법상 흔히 '무의식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본래 조금은 어두워야 할 무의식에까지 빛이 들어온 모습이고, 이 역시 '과의식 상태'와 정합적이다.


*보통은 '산'보다도 '바다'가 무의식의 모습으로써 더 자주 나타난다. 둘의 차이는 대략 다음과 같다.

바다 : 수평. 방향에 대한 기준이 적음. 수면 아래(깊이)가 핵심. 개별성이 약화되고 '큰 흐름'이 강조. 정동은 압도/경외/해방으로 나타남

산 : 수직. 고도/능선 등의 지형 단서. 어디로 오를지에 대한 결정이 핵심. 내가 발 디딜 곳을 내가 선택함. 정동은 집중/판단으로 나타남


우리가 꿈의 사건/구조를 파악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자들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도 보다 자세히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이라는 점에서 '집단성'이 보이며, '암컷 수컷 다 있다'는 점에서 '남성적, 여성적 기능/가치의 혼합'이 보인다. 여기까지 선행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야 비로소 고전적인 의미를 적절히 맵핑할 수 있다. 사자의 고전적인 의미―권력, 열기, 본능적/동물적 소양 일반 등―중에서

앞선 요소인 '집단성'과 합치되며

'위협'으로 느껴질 만한 것

은 무엇인가?

권력이 가장 정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권력이 주로 작동하며, 남성적+여성적 기능/가치가 혼합된 집단'은 무엇인가?

높은 확률로, 직장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꿈이 "직장집단에 대한 '나'의 잘못된 인식/대응"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꿈 도입부에서 '나'는 사자―직장집단과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그러자 '저들과 내가 상호관측된다면' 즉, "내가 회사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나는 죽는다"라는 생각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꿈 맥락상 그 생각이 직장집단이 직접 내보인 위협이라기보다는 '나'가 스스로의 '과의식'으로 상상한 위협이라는 걸 안다.




보충 -  개인사 반영


꿈꾼 '나'가 이 꿈이 말하는 바와 꽤 일치하는 여러 행동/사고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걸 일일이 다 열거한다면 이 글이 '개인 결함 폭로' 수준에 머물게 된다. 우리의 관심은 비난이 아니라 '꿈이 내면을 반영한다는 것을 검증하기'에 있으므로, 그런 검증적 효과가 강한 두 가지 사례만 제시하려고 한다.


1. '나'는 이 꿈을 스스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밝은 산 : 거룩한 산

사자 : 자기가 통합해야 할 본능/잠재력

산을 올라감 : 영혼의 오름길. 수행적 여정

뱀에게 묶임 : "통합해야 할 본능을 유예했으므로 아직은 영혼의 오름길을 오를 수 없다"는 지혜의 메시지.

이런 해석은 '해석 실력'과는 별개로, "남보다 잘나지려는 태도"와 정합적이다.


2. '나'는 이 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꿈 분석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꿈에는 굉장히 깊은 진실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타인의 꿈을 분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진실을 지나치게 파헤치는' 것 아니냐"라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꿈에서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꿈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라고 한 모습과 정합적이다.


아울러, 이건 꽤 역설적인 지점인데, 어느 정도 분석을 마친 지금 시점에서 ‘사자=권력', '뱀=지혜' 식의 고전적인 맵핑이 ‘새로운 방식으로’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꿈에서 사자는 정말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권력'을 의미했고, 뱀-거머리는 "남보다 잘나지려고 하면 안 돼~"라는 '지혜'로운 메시지를 표상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상징 맵핑 → 구조 파악' 의 순서를 채택했다면 되려 절대로 지금과 같은 주가설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자가 권력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왜 권력인지, 뱀이 지혜라면 어떤 방식으로 왜 지혜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건 '구조 파악 → 상징 맵핑'의 순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꾼 '맹수꿈'을 보자. 이 예시를 통해, 우리는 꿈이 비슷한 요소를 사용해서 아예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을, 즉 우리가 왜 '구조 먼저, 요소는 나중에' 봐야 하는 지를 알 수 있다.


굉장히 멋진 초원이다. 나는 초원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있다. 저기 초원 한가운데에 있는 호랑이도 늠름하고 멋지다. 나는 곧 "음... 꿈에 호랑이가 나오면 보통 날 쫓아오지 않나?"라고 생각하고, 그때쯤 정말로 호랑이가 쫓아온다. 나는 "역시 맞군!!!!!!!!"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치지만 호랑이에게 잡히고, 잡히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정리· 적용

‘나’는 남성적, 여성적 가치/기능이 혼합된 어느 권력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혹은 그 집단을 마주하고 있다). ‘나’가 지나치게 모든 것을 의식하는 나머지, ‘나’는 자기가 집단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집단에 의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집단보다 잘나지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현 상황에서 '남들보다 잘나지려고 하는' 태도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태도는 ‘나’가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다리를 묶고, ‘나’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서 소모시킨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다.

∴ ‘나’는 이 문제를 직시하고, 남보다 잘나지려는 시도를 그만두어야 한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