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본에 취업했던 이유 (11화)
내가 다니던 일본 회사는 매일 조례가 있었다.
지금도 여러 일본의 회사들은 아직도 조례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아침 8시 출근 (농한기인 겨울 시즌에는 8시 30분 출근) 이후 약 10분 정도 사내 방송으로 전사에 연락 사항을 전달하고, 사내 멤버 모두가 한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근황 등을 얘기할 수 있는 스피치를 했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
대개는 자기 가정 내부의 얘기도 하고, 차를 좋아했던 사람은 차 얘기도 하고, 영업 실적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창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행했었을 때였으니 그것에 대해 얘기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엔 재미 없었는데, 매일 듣다보니 이게 은근 재밌더라.
하루하루 다른 사람들의 썰을 들어보니 일본어 공부도 되고,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임군, 이제 너 차례야
입사 5개월 차가 되서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일주일 전부터 고민을 했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요새 한창 취미로 시내에 야마하 피아노 연습장을 자주 들렀었는데, 피아노 얘기를 좀 해볼까?
음.. 그리고 내가 요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도 좀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근데 3월인데 이 동네는 아직도 춥네? 한국 같았으면 벌써 봄에 과잠 입으면 더울 수준인데..
한국 날씨좀 찾아봐야겠다.'
스토리를 구성했다.
1. 첫 번째로는 나의 취미인 피아노. 그 중에서도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감명 깊게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대해서.
(사실 이 곡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음악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 보여주신 '노다메 칸타빌레' 드라마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던 곡이다.)
2. 두 번째로는 당시 동남아시아 : ASEAN 각국에 대한 책 (池上彰の世界の見方 東南アジア: ASEANの国々)을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서.
3. 세 번째로는 홋카이도와 한국의 날씨에 대하여.
(당시 3월 중순, 홋카이도는 아직도 눈이 내리는 겨울이었고, 그 날의 기온은 -4도였다. 한국은 찾아보니 17도였다.)
연습은 될 때까지
최대한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나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었다.
대략적인 이미지로 스피치 대본을 구성하고, 세세한 부분을 수정했다.
그 날에는 괜찮아보였던 표현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면 자연스럽지 못해 보여 다시 수정하고,
쓰다보니 '이건 좀 뜬금없네..'라고 보이는 문장들도 있어 또 수정하고.
당시에는 거의 매일 저녁, 일이 끝나고 돌아와 사택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방수 짱짱인 아마존 킨들 전자책을 보며 목욕을 즐기곤 했었는데,
스피치 당일 일주일 전부터는 저녁에 욕조에 들어가 내가 구상해놓은 대본을 직접 말하는 연습을 했었다.
(준비하다보니, 예전에 한국에서 대학교 교내 강연 준비했던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더라.)
연습을 하며, 스피치 대본을 말하는 시간도 재보았는데, 예상한 것보다 시간이 좀 길었다.
혹여나 너무 길어서, 듣는 사람들이 지루해하진 않을까 싶어, 일부 내용들은 삭제했다.
수십 번 정도는 연습하며, 스피치 전날 저녁에는 대본을 거의 외울 정도 수준이었다.
스피치 당일.
당시 사람과의 친화력으로 영업력이 정말 뛰어나셨던 과장대리님께서 (우리나라로 치면 대리이다. 일본에서는 주임과 과장의 중간인데, 과장(진)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내 자리로 와서 은근슬쩍 물어보신다.
"임군, 스피치 준비는 잘 되었지?"
내가 대답했다.
"완벽하죠. 기대하세요."
대학교 때가 생각났다.
2층 수많은 사람들이 있던 사무실에 올라가서, 앞에 서게 되니 정말 떨렸다.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대학교 강연 때는 나에게 비춰지던 조명의 역광 덕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참 편했는데..'
조금 떨렸지만, 스피치를 시작했다.
이 후, 계속 얘기하다보니 사람들이 내 말에 경청해주는 것을 보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중간부터는 여유가 생겼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자연스럽게 했다.
스피치가 끝나고 고맙게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
당시 스피치 내용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설과의 임유빈입니다.
저는 요새 주말이나 한가한 시간에 취미인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최근 연습하고 있는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인데, 아마 아시는 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흐마니노프 작곡가는 원래 러시아 출신으로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에 걸려 마음의 병으로 인해 이런저런 고생을 하며,
결국 작곡의지까지 없어진 때에, 니콜라이 달이라고 하는 한 의사로부터 심리적인 치료를 받으며 완성한 곡이기도 합니다."
(추가로 설명하자면, 라흐마니노프가 청년 시절 고생하여 만든 교향곡 1번이 '이집트 7대 재앙과도 같은 곡, 지옥으로부터 온 듯한 곡' 등의 악평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것으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고, 그 후부터 우울증이 심해졌다.)
"이곡이 실제로 완성되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함께 연주되었던 때에,
곡이 끝나고 모든 관객들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고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우울증을 극복하게 되었고,
결국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러 명곡들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역시 피아노라는 것은 자기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기분, 생각 등을 음악으로 확실히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최근 동남아시아에 관한 책을 좀 읽고있는데, 동남아시아 각국의 경제적 상황이나 정치적 사정 등을 정리하여 설명한 책으로, 매일 목욕하며 책을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동남아에서 1년간 생활하며, 자원봉사 활동으로써, 현지 아이들에게 피아노나 한국어를 가르쳤던 경험이 있기에,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동남아시아가 정말 그립다고 느낍니다."
"태국, 베트남, 그리고 라오스를 시작으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현재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나라들로부터 ODA라고 하는 국제경제협력을 지원 받아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 고향인 한국도 옛날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한국 땅에서,
여러 나라들의 국제 지원과 국제 협력을 받아 성장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자기 자신이 받은 것 이상, 그리고 자국이 받은 것 이상만큼, 다른나라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일기예보를 찾아보았는데, 고향인 한국은 17도까지 기온이 올라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곳 홋카이도도 꽃피는 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쪼록 여러분, 나날이 바뀌는 일교차에 주의하며,
근무하실 때도 여러분 건강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다음 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