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가정 그리고 투잡

나는 내가 열심히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 (14화)

by 임유빈
가장의 무게


어느덧 7월,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고, 심지어 밤에조차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 기온.

습하고 더운 탓에 창고 안에서 잠시 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모기가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고는 도망가버린다. 대형 선풍기를 돌려 그나마 땀을 식힐 수 있었던 때였다.


오늘은 함께 일했던 형님들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내가 일하던 야간 현장에는 까대기만 하시던 분들이 두 분 계셨고, 내가 야간팀을 전담해서 맡게 된 당시에는 회사를 그만두셨던 선배 분 한 분이 계셨다.


회사를 처음 들어온 당시에는 선배 한 분과 까대기를 하시던 한 분과 선배 한 분만 계셨는데, 나머지 한 분은 허리가 안 좋으셔서 잠시 휴식 중이라고 했다. 그 분은 1~2달이 지날 때 즈음 해서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나는 처음에 이 분들이 야간 일만 전업으로 하시는 분들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세 분 다, 투잡을 위해서 야간에도 나와서 일을 하셨던 것이었다.

다들 가정과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투잡이라는게 만만히 볼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 분들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와, 다시 야간 일을 시작해서 새벽 1~2시 정도에 끝나고,

(현장 분들은 마지막 반입 화물 작업만 끝나면 퇴근한다.)

집에 돌아가서 다음 날 출근을 준비해야 하니, 실질적으로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3~4시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것도 야간 현장에서의 육체 노동이니, 피로는 더 쌓일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화물 반입과 서류를 도와주셨던 부장님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는 다른 공항쪽 업무를 하시다가 밤이 되서 투잡으로 이쪽 일을 하셨다.

하루에 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보니, 주중에는 공항에서 계시며 씻고 일하시다가, 토요일 저녁에 잠시 가족들을 보러 버스 막차를 타고 인천에 있는 집에 다녀오신다고 하셨다.


나야 주간에 학교 수업을 듣고, 야간에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었으니 그닥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분들처럼 투 잡을 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잠시 쿠팡 센터에서 야간 일용직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헌데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같았다. 그곳에도 주간에 다른 일을 하고 야간에 돈을 좀 더 벌기 위해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대체로 이모 뻘 되는 아주머니들과 삼촌 뻘 되는 50대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의 사정도 똑같았다.

가정을 위해서 밤에도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쿠팡 일용직 알바 당시 (2024년)

내가 몰랐던 사회 속 모습


한창 여름이 시작된 때였다.

현장에 계셨던 형님께서 갑자기 건강이 조금 더 안 좋아지셔서, 자리를 일 주일 정도 비우게 되셨다.

잘못하면 수술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야간 팀장님께서 대신 나오셔서 일을 도와주셨다.


얼마 후, 현장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도중, 저 멀리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괜찮은 안색과 걸음걸이로 창고에 들어오시는 현장 형님을 본 나는 몸은 좀 어떠시냐고 여쭈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술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고 경과를 조금 지켜보면 될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밝은 모습으로 이렇게 얘기하셨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의사 선생님께 별 문제 없다고 들었는데, 또 다시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죠."


당시 이 분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유치원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귀엽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가슴이 참 뭉클했다. 아마 딸 바보가 아니셨을까.


당시까지만 해도 내가 거쳐왔던 회사에서,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 중에서 투잡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뉴스에서 언급되었을 때나 관심 있게 봤을 뿐이었다.


일본에서 일했을 당시에는 회사 내규 상 투잡 혹은 겸업이 금지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일본은 회사 내에서 복지 차원에서 꽤 낮은 이자율로 직원들에게 주택 대출 론을 제공하기도 하고, (월세의 경우에는 직원들에게는 달에 10만원 이하로 사택을 빌려주거나, 자취 시에는 매달 월세 금액의 80~90% 이상 보조를 해주어 돈이 들어가지 않게 했다.) 교통비부터 생활비까지 기본급 외 여러모로 많이 챙겨주었기에, 굳이 투잡을 할 일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일했던 곳도, 업계에서 꽤나 규모가 큰 외국계 기업이었고, 급여 면에서도 그렇고 복지가 괜찮았기에 굳이 투잡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외국계 회사를 퇴사하고, 대한민국의 흔한 조그마한 중소기업의 현장에서 일을 해보니,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그리고 보지 못했던 사회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인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벽의 인천공항 화물터미널 모습 (2024년)

퇴사, 그리고 목표를 향해


나는 7월 말 경, 야간 팀장님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운전과 까대기 업무가 어렵거나 힘들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공항 바깥쪽인 화물청사에서 일을 하며 비행기를 바라보았던 나의 마음이 공항 안에서 일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바뀌었던 것 뿐이었다.


마지막 출근일, 귀여운 딸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로 해놓으셨던 현장 형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다.

“유빈씨, 대학 나온거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쭉 같이 일하면서 얘기해보니까 금방 알겠더라고.
유빈씨가 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나도 이런 저런 일들 많이 하다가 이제와서 보니 결국 나에게 맞는걸 찾았는데, 유빈씨도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도전해요.
사람은 본인에게 맞는걸 해야 되더라고. 잘 할거야.“


나는 퇴사를 한 뒤로도, 가끔 샌드위치랑 음료수를 사서 찾아뵈러 갔었다. 갈 때마다 잘 지내냐고 반겨주시던 형님들의 모습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아마 현장에서 같이 일하다보니 형님들과 정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다음 화에서.



당시 일했던 창고 내부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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