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몽드와 아들 실반

니콜라스 이야기 2

by 전윤혜


1960년은 그런 해였다. 파리에서는 헐리우드 영화를 거부하며 실존을 논하는 누벨바그 운동이 일었다. 자중해 건너에선 식민지 알제리가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다. 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사람의 존재는 무엇인가, 자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고 살육의 거대함 앞에 한낱 부질없는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그해 가을 레이몽드는 실반을 낳았다. 참한 갈색 머리 아기였다. 좁은 하녀방에서 아이를 낳고 복도의 공동 세면대에서 아기를 씻겼다. 옆방의 다른 집 가정부들은 실반의 울음소리를 매일 밤 들어야만 했다.


아이가 없는 테리용 내외는 실반을 무척 귀여워했다. 덕분에 레이몽드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었다. 아이가 탁아소에 갈 무렵부터는 아침에 데리고 출근했다가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데리고 온 뒤 퇴근했다. 당시 육아는 오로지 여성의 몫이었다. 월급 통장마저 남편의 이름으로 만들던 시절이었다. 실반이 아장아장 걸을 무렵 알제리가 독립했다.


레이몽드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하루는 로제가 누군가 자기를 감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징후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점차 집안의 물건과 따라오는 사람, 편지를 전해주는 집배원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도청과 미행을 당한다고 주장했으며 온 집을 뒤지고 커튼을 쳤다. 망상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짐작된다.) 증상은 심해져 정신병에 이르렀다. 로제는 공장을 그만두었다. 레이몽드는 생계를 꾸려야 해 일을 쉴 수 없었지만, 실반을 로제와 둘 수도 없어 계속 데리고 출근해야만 했다. 실반은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엄마는 바빴고 아빠는 이상했으니까. 파리 거리에는 학생들이 반전을 외쳤고 기성세대와 대립했다. 68 운동이 일어났다. 최루탄과 군대의 총격이 이어졌다. 로제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 뒤 테리용 부부가 은퇴를 선언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파리의 공장과 건물을 처분하고 남프랑스 칸으로 내려왔다. 레이몽드도 그들을 따르기로 했다. 이제는 십 대가 된 실반과 함께였다. 회색빛 파리에서 쨍한 지중해로 터전이 바뀌었다. 칸에는 테리용 부부 외에는 아무 연고도 없었다. 파리를 떠나며 레이몽드는 자신의 과거를 정리했다. 그렇게 로제는 그녀에게 ‘리우’라는 성만 남긴 채 그녀의 인생 속에서 사라졌다.


칸의 부촌인 라 캘리포니(La Californie)에는 오래된 저택과 새로 들어선 현대식 집이 나란했다. 집은 희었고 나무는 푸르렀다. 테리용 부부는 언덕 위 모던한 빌라의 꼭대기 층에 살았다. 지붕이 반만 덮인 단독 정원이 있었고 눈앞으로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부부는 파리에서처럼 그들의 집이 보이는 곳에 레이몽드의 방을 얻어주었다. 레이몽드는 퇴근하고선 하나뿐인 창문을 바라보며 울곤 했다.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삶은 그녀에게 버거웠다. 르망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었다.


실반은 정든 동네를 떠나 갑작스레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됐다. 엄마는 여전히 바빴고 아빠는 사라졌다. 엄마는 같이 시간을 못 보내는 대신 용돈을 많이 줬다. 외로웠던 그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공터에 모여 스쿠터를 타고 담배를 피웠다.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공부의 재미를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중학교를 마친 실반은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실업 학교를 가기로 했다.


무엇을 공부할까? 레이몽드 집안에는 제빵사가 많았다. 그녀의 동생 곧 실반의 외삼촌인 제라르와 장이 제빵사였고 장의 두 아들도 그랬다. 실반도 자연스레 제빵의 길을 따랐다. 공부는 잘 못했지만 대신 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있었다. 그는 칸 뒷골목의 빵집에 취직했고 레이몽드로부터 독립했다.


실반은 아침에 팔 바게트를 굽기 위해 새벽부터 출근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술을 좋아했다. 어떨 때는 거나하게 취한 채 친구들과 한밤중에 1,000미터 되는 산마을 에스크라뇰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를 하곤 했다. 불빛 없는 산길을 스쿠터로 경쟁했다. 헬멧이 의무가 아니던 시절, 반팔에 슬리퍼를 신고 위험천만한 일들을 벌였다. 실반은 밤마다 술을 마셨다. 치기 어린 그를 제지할 사람은 없었다. 아슬아슬한 삶이 이어졌다. 일을 그만두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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