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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스티아 Oct 04. 2023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 확인하는 법

그대 앞에 놓인 길이 분명히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 다른 사람의 길일 것-

특별한 목표나 의지 없이 건강과 양생이나 힘쓰자며 시작한 태극권은 처음에 정말 재미가 없었다. 지금도 처음 태극권을 시작할 때의 어색함이 생생하다. 태극권이란 운동이 갖는 고정관념에 걸맞게, 내가 태극권 수련을 시작한 타임엔 은퇴한 어르신 두 분이 계셨다. 무술에 전혀 관심도 없는 데다 어르신들 사이에서 어려워하며 눈치 보며 수련을 하려니 이거 내가 제대로 다 배울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여기엔 우리 관장님 지도 방식도 한 몫한다. 처음 오면 약 한 달간 보법, 기본동작의 자세를 제대로 익힐 때까지 태극권은 한 동작도 안 나간다. 그런데 보법과 기본동작을 하기 위해선 기마자세로 앉은 채 몸의 무게중심, 무릎의 위치, 방향, ‘목’이라 붙은 신체의 모든 곳에 힘 빼기(목, 손목, 발목). 이 모든 것들을 신경 쓰면 한 동작하는 게 정말로 어렵고 재미가 없다.      


영화 <경주>를 보면 박해일이 동네에서 태극권 하는 아줌마를 보고 엉거주춤하게 따라 하는 장면이 있다. 태극권을 배우기 전엔 모르는 사람 뒤에서 따라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제대로 태극권을 배우게 되면 태극권에서 제일 중요한 건 힘을 빼고 정확한 자세를 취하는 것, 그리고 동작이 끝날 때마다 각각 다른 동작을 하던 팔과 다리가 정확한 순간에 일치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지금 수련하는 곳에선 엉거주춤하게 동작이 다 틀린 채로 한 번에 따라 하는 방식으로 지도하지 않는다.      



보법과 기본자세를 익힌 후 태극권을 시작해도 일주일에 딱 한 동작만 나간다. 시작할 때 준비 동작 배우는 건 5분도 안 걸리는데, 일주일 내내 그 동작만 연습하게 한다. 대신 그다음 주에 진도 나갈 때면 이전 주에 배웠던 것을 앞에 붙여 누적해서 연습한다. 아무리 그래도 누적된 것이 조금 이어지는 맛이 있으려면 최소 3개월은 해야 한다. 그동안 이것만 하면 지루하니까, 선요가라든지 개인적 신체 컨디션에 맞는 별도의 운동들을 가르쳐주고, 서서 명상하는 참장공이라든지 앉아서 하는 좌선이라든지 여러 프로그램을 다 소화하게 한다. 그래서 사실 한 시간이 빠듯하긴 한데, 성질 급하고 빨리빨리 배우고 뭘 해보려는 사람들에겐 참 안 맞는 방식이긴 하다. 여기선 태극권 108식을 다 배우는데 넉넉잡고 1년 반정도 걸리니까.     



이 방식이 처음엔 돌아가는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 보면 굉장히 효과가 빠른 방식이다. 태극권 수련의 차원에서도, 내면 통합의 명상 차원에서도. 다만 3개월 안에 이 방식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그 선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이럴 때면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영웅의 여정이라 표현한 과정 중에 관문 수호자를 만나는 순간이 떠오른다.     


조지프 캠벨은 세계의 수많은 신화를 분석해서 공통된 패턴을 발견했는데, 그걸 영웅의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관장님 밑에서 전문 수련을 한 지 7년이 넘고, 명상 자체를 시작한 지는 거의 20년이 넘어가는 입장에서 보면 이 영웅의 여정은 정확하게 내면 통합의 여정에도 들어맞는다.     


영웅은 어떤 이유로 모험에 소환받고, 처음엔 거부하다가 모험 길에 오른다. 내면 통합의 모험에 소환받는 것도 보통은 달갑지 않은 형태, 인생의 많은 문제로 오는 경우가 많다. 신화에서는 ‘납치’란 비유로도 많이 나타난다.      


모험 길의 첫 관문엔 관문 수호자가 있어, 그를 통과하지 못하면 모험을 지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세계는 훨씬 더 강력한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만 여행할 수 있으니까. 여행에 성공해서 무사히 보물을 갖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훨씬 성장한 삶을 살 수 있겠지만, 그를 위해선 제대로 된 문인지,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해서 여행을 지속할 힘이 있는지를 관문 수호자가 시험한다.      


이런 관문 수호자는 내 선택이 맞는지 확신이 안들 때 길목에서 알려주는 지표기도 하다. 한 때 꿈을 이루려면 꼭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 과정이 있었다. 한 번 시작하면 최소 몇 년 이상을 투자해야 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그 과정을 검색으로 찾아내는데도 꽤 품이 들었고, 내게 필요할지 말지 상당히 오래 고민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후 일단 상담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알아보던 중, 상담을 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공부였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 길을 내려놓았다. 내겐 그 상담이 관문수호자 역할을 했다.      



지금 태극권 수련장에선 처음 배울 때의 3개월이 관문 수호자 역할을 하기에,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되돌아간다. 그렇다고 이 문을 통과한다고 해서 바로 무슨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태극권 동작을 익히는데도 1년 6개월이 걸리는데, 그래도 이건 동작을 익혔을 뿐이지 이제 진짜 태극권 수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힘을 계속 더 빼고, 단전에 집중해서 기운을 더 쌓을수록 점점 어떤 반응들이 나타난다. 수련 과정에 소소하고 신기한 반응들도 많이 일어나지만 이렇게 했을 때 내면 통합의 진척이 빠르다. 어느 정도 내면 통합의 진척이 있다고 확인받은 건 4년 정도 지나서였던 것 같다. 


4년이 길다면 길 수도 있지만, ‘마스터’ ‘장인’ 혹은 ‘수행자’들이 일생을 걸고 수련을 하는 걸 생각해 보면 길지도 않다. 물론 내가 마스터라는 건 아닌데, 이 궤도를 제대로 가고 있구나, 이대로 계속하면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드는 정도다. 적어도 신비체험과 수련의 진척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구분할 수 있다. (이 둘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신비체험한 사람들의 말을 비판적으로 살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른 뭔가를 배울 때, 4년 안에 그 정도 느낌을 받은 게 얼마나 되던가.     


내가 수영 배울 때는 한 동작을 완벽히 마스터하지도 못했는데 일단 진도를 계속 나가면서 여러 번 반복했던 방식으로 배웠다. 그랬더니 2년이 지나도 구멍 난 부분들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실력도 덜 늘었다. 내 입장에선 수영도 마스터하기 쉬운 종목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에너지를 통합하는 건 어떤 차원에선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 거기서 어떤 감을 잡는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신 그 과정에선 필요한 부분이 있다. 꾸준함, 집중력. 그리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지려는 자세. 

머리 좋은 것, 재능이 있냐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될 때까지 하려는 꾸준함, 그리고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집중력이라 생각한다. 집중력은 태극권 수련을 하면서 단련이 되긴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이다. 이건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긴 한데, 내 잘못이란 표현은 절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잘못, 시비를 초월한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내면 통합의 계기로 삼아 책임을 진다는 걸 말한다. 이 말을 가슴깊이 받아들이고 꾸준히 실천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착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 인생에 일어나는 부당한 일들이 너무 많을 것이기에. 그래서 이 문을 통과해 꾸준히 나가기 위해선 내 삶의 모든 것에 책임지려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우리 관장님이 저런 의도를 갖고 관문수호자 역할을 하는 줄은 모르겠다. 그 3개월의 기간 안에, 관장님의 지도 방식이 맞지 않아서 나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다만 지도 방식에 공감을 하고 3개월을 넘어 버티어 그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저 세 가지 기본기를 통해 훨씬 더 깊은 수련에 도달할 확률이 높아지긴 한다. (앞으로 꾸준히 할 확률이 높으니까.) 그렇게 태극권 수련에서도 관문 수호자가 진짜 내가 살아야 할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진로 고민은 10대, 20대 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큰 힘이 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지금은 제목이 '블리스로 가는 길'로 바뀌었지만, 예전 제목이 더 마음에 와닿는 책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가 있다. 역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책이다.    

 

"그대 앞에 놓인 길이 분명히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 다른 사람의 길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를 통과하는 시절인연은 있을지언정, 결국 자신만의 삶은 매 순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살아가면서 만들어진다는 것, 알고는 있다. 하지만 나 빼고는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서 나아가는 것 같아 불안하고 조바심이 날 때, 그 감정이 이렇게 보편적임을 확신을 담아 말해주는 문장이라니!    


 

이 길이 맞는지 하나씩 문을 열어보며 더듬어 갈 때, 눈앞의 관문수호자가 하나의 힌트가 되기도 한다. 내겐 필요 없는 문이었거나, 때론 아직은 필요 없는 문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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