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서 말하는 인생에서 무의식의 의미

by 헤스티아

우리가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괴로움들을, 의식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뜻대로 안 되고, 내 의지대로 안 되는 일 투성이다.


인간의 삶은 의식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의식적 선택 + 무의식적 반응의 합으로 구성된다.


일단 이걸 기본 전제로 받아들여야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관된 기준이 생기고,

더 중요한 건 내가 이해한 게 진실이든 아니든,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기 시작한다.


그럼 이제 여기서부터 큰 숙제가 하나 생긴다.

과연 '무의식'이란 게 뭐냐...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의 폭, 심지어 삶의 양상조차 크게 달라진다.


현재 나의 정의로 무의식은 의식의 존재밀도 평균 진동수를 넘어서는 분야의 존재 진동수다.

평균을 넘어선다는 게 까다로운 건...

평균을 웃돌아 넘어설 수도 있고,

평균 범주에 미치지 않아서 넘어설 수도 있다.

― 여기까지가 ‘무의식이 왜 단순 정의로 설명되지 않는지’에 대한 전제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후 이야기는 계속 엇갈린다.



그 둘을 동시에 감안하고 논의를 진행해야 해서, 일관된 설명으로 하나로 정리할 수 없고,

맥락을 아주 아주 아주 정교하게 정리해서 '이때는 이렇고 저때는 저렇다'라고 맥락을 감안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은 애초에 의식의 평균을 넘어서는 지점이면, 의식으로는 알 수 없나?

안다고는 하지 못하지만,

의식적으로 다루려는 노력은 많이 해왔다.


칼 융과 같은 분석심리학적 접근,

NLP, 최면 등으로 기술적으로 다루려는 시도,

호오포노포노도 무의식의 단계를 상징적으로 구분하고 설명하고 다루려 하고 있고..

현대 인지과학에서는 신경계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전통 선수행에서 공 단계 이상의 수행에서는 그 단계를 촘촘히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자각 능력을 훈련한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무의식은 애초에 코끼리 다리 만지기처럼 의식은 일부만 알 수 있을 뿐인데,

내가 지금 뭘 만지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채 모두가 '나는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서로 얘기하고 있는 게 다르다.

그래서 이 글은 무의식에 대해 한번에 정리를 하기보다는, ‘왜 설명이 계속 어긋나는지’를 먼저 정리하는 글이다.


그래서 무의식을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내가 경험하고, 의식적으로 해석'하는 것뿐이다.

나는 몸미학을 공부해 왔기에,

몸으로 경험하고 인지하는 것을 계속해서 요즘 특히 더 강조한다.


피아노든 수영이든,

내가 직접 경험하고 쳐보고 실력이 늘면,

이렇게 할 때와 저렇게 할 때의 차이가 스스로 구별되는 지점이 있듯이,

스스로 경험한 만큼 구분이 된다.


피아노와 수영도 실력이 는다는 개념이 있듯이,

무의식도 더 렌즈가 넓어진다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무의식에서 렌즈가 넓어지려면, 같은 진동수 레벨에서 아무리 멀리 가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땅에 붙어서 아무리 그 땅을 샅샅이 살펴보더라도,

드론으로 보는 것과는 시야가 다른 것과 비슷하다.

기존 명상 표현으로는 깊어진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깊이’는 더 많은 체험이 아니라 기준점이 바뀌는 문제다.


문제는 무의식 체험 자체가 의식을 넘어서서 일상적인 기준점이 없고,

스스로는 이 체험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스케일이 없기 때문에

내가 땅에서 옆으로 계속 펼쳐지는 체험을 하고 있는지,

깊어지는 체험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꾸 멀리 가보고,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스승의 인연을 찾든지,

혼자 하는 내면 체험은 '아, 이런 게 있었구나. 그렇지만 이건 본질이 아니지.' 하고 내려놓으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다.


무의식..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존재하는 밀도의 진동수가 실제로 삶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에 내가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계속 쏟으면 실제 현실로 드러나는데, 그게 바람직하지 않을 때가 많아서다.


이건 신비주의가 아니고,

애초에 선수행에서 마음의 근본을 따지면,

마음은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 에너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마음을 현대인들의 에고가 '심리' '기분' '태도'라는 의식적 현상으로 번역해서 자꾸 오해가 생기는 거고.)

이 근본 에너지를 나는 지금 '존재 밀도의 진동수'라고 표현한 것이다.


현대 인지과학이든 뇌과학이든 모두 이 근본 에너지의 원인은 설명할 수 없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그렇기에 학문은 이미 발생한 에너지 이후의 경과를 추적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각각의 해석은 명상이든 종교든 거기서 맡을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해 내 입장을 먼저 밝힌다.

이건 인류가 뭐가 진리라고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고, 학문은 그래서 그 앞에서 말을 멈췄고,

각 종교가 각자의 해석을 유지하고 있는 영역이다.

다만, 어떤 해석을 선택하든 누군가의 생에서 그 사람이 이번 생 에고의 집착으로부터 넓어지기 위해 기능하는 해석이라면 그 사람의 삶에서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말하면, 나의 믿음과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좋다고 권할 필요도 없고, 나는 다른 더 좋은 길을 가고 있어서? 알려주고 싶을 필요도 없다. 그냥 저 사람에겐 저 길이 필요한가 보구나... 정도로 보면 된다.)


아무튼... 명상은 이 근본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다룰 수 있는 훈련 과정이다.


그리고 아까 쓸데없는 체험에 집착하고 엉뚱한 방향을 좇으면 바람직하지 않은 삶이 일어난다는 말.

이건 신비주의적 저주가 아니라,

그냥 삶의 구조가 그렇다.


여기서부터는 설명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관찰이다.


우리는 이 생에 나의 에고의 집착을 하나씩 태워내고, 더 넓어지고 더 통합된 존재가 되기 위해 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에고는 그걸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집착한다.


그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에고의 집착을 완전히 닫기 위해서는 신경계 차원의 각인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그걸 보통 의식으로, 의지로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보통은 삶이 떼굴떼굴 굴린다.

내가 그 가능성을 끝까지 살아내고,

그리고 이제 됐다..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까지.

실패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 가능성에 미련이 없어질 때까지.


그래서 내가 어떤 집착을 가지고 무의식 현상을 좇으면, 나의 에고의 방향을 좇기 쉽고,

그게 나의 존재 통합에 딱히 긍정적이지 않게 되고,

그러면 원인을 무의식이라 표현하든, 삶이라 표현하든...

내 생에서는 나의 존재 통합에 도움이 되기 위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며,

그 과정이 보통은 즐겁거나 달갑지 않고, 대부분 고통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무의식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읽어주는 스승이 없다면,

어지간하면 신비 체험 현상을 좇지 말라고 말한다.


지난번에 위험한 스승을 피하는 법에서,

고정된 실체를 두지 않는 석가모니의 말을 인용했다.


무의식 수련도 비슷한데..

최면이든 호오포노포노든 분석심리학이든 명상이든 선 수행이든...


다루고자 하는 무의식의 범주는 솔직히 구분이 되긴 한다.

그런데 그건 이론이고, 지향하는 바인데...

실제로 그것을 수행하는 실연자는 별개의 문제다.


내가 분석심리학이나 선 수행 한다고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최면을 다룬다고 나의 무의식이 늘 얕은 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리고 늘 말하듯이 마음은 찰나마다 머무는 곳이 달라질 수 있어서

특정한 개인이라고 가장 높은 상태를 늘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앞의 상태만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현실에서 쓸 수 있는 기준으로만 정리해보면, 결국 남는 건 태도 몇 가지다.



. 인생은 의식과 무의식의 합이고

. 무의식이 현실의 많은 부분을 일으키는데...

. 가능하면 무의식을 의식의 고삐로 합일해서 함께 나아가는 것... ( 의식이 끌고 가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무의식과 통합을 이뤄야 하고... 그 과정이 명상 수행이고 그림자 통합이다.)

. 내 현재 무의식의 상태를 스스로 의식적으로 읽을 수 있는 환경이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면 내려놓고

. 어느 수행법, 어느 스승이든: 행동, 현실, 시간의 무게를 버티고 살아남은 상식적인 동서고금의 지혜와 어긋남이 없는지를 살펴 찰나의 순간으로 받아들일 부분만 받아들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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