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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스티아 Jan 30. 2024

명상, 방법은 달라도 효과 빠른 사람들의 공통점

명상으로 삶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뀐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근원적 문제까지 바꾸는데 적지 않은 수련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구는 오랫동안 수련을 해도, 집중, 편안한 마음, 기분 좋아짐 같은 단편적 효과만 누리고,

누구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까지 해결되는 진척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어떤 사람들은 굳이 명상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할 뿐인데도, 

오랫동안 명상 수련을 한 사람보다 삶의 문제가 더 근원적으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 비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명상 수련에서 진척이 빠르고, 근원적 차원까지 문제 해결의 효과를 보는 사람들,

그리고 명상을 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집중 혹은 몰입해서 내면 에너지의 수준을 올리는 겁니다.

진동수, 혹은 주파수라고 표현을 할 수도 있겠네요.


저는 우리가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 결국 이번 생에 마지막으로 이루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내면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내 삶에 던져지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면 에너지 수준이 높아지니까요.

뒤집어 생각하면 내면 에너지의 수준을 높이면 삶의 문제가 더 빨리 해결됩니다.




그러면 내면 에너지는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요?

앞서 몰입, 집중이라고 언급했는데요, 여기에 세 가지 정도의 전제 조건을 공유하면 앞으로 제가 글로 풀어낼 이야기가 좀 더 소통이 쉬울 것 같습니다.


첫째. 명상의 진척, 내면에너지의 통합은 에너지를 높이는 것이다. 이는 옆으로 펼쳐지는 반응과 구분된다.

둘째. 특정 진동수를 유지할 때, 펼쳐지는 각각의 삶이 있다.

셋째. 내면 에너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가로막고 있는 찌꺼기 에너지의 정화가 필요하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좀 더 공유가 되겠지만, 지금은 간단하게만 덧붙여 보겠습니다.



첫째. 명상의 진척은 오직 위로 에너지를 높이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

이것은 수많은 신비주의적 반응과 명상의 진척, 내면의 통합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등산에 비유해 볼게요.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있고, 각각의 고도가 있습니다.

이 고도가 높아지는 것만 진척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중간에 옆으로 새어 산속을 구경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옆으로 펼쳐지는 반응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꼭 진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내면 에너지는 점프를 합니다.

순간의 몰입 정도에 따라 매번 고도가 달라진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10m를 올랐다고 해서 그다음에 11m에 있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500m에 있다가, 다음 순간 20m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명상의 진척을 확인하고자 하면, 내 반응이 어느 정도 고도에서 일어나는지 읽어줄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게 좋습니다. 만약 그런 여건이 아니라면, 궁극적인 통합을 표시하는 핵심 반응(이건 다른 글에서 설명할게요)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가 겪는 모든 반응은 알아차리되, 그냥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앞서 내면 에너지는 점프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0m에서 바로 500m로 바로 몰입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50m, 100m에서 겪고 있는 사람들의 신비 반응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명상의 진척이 있는데, 왜 나는 별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둘째. 특정 진동수마다 옆으로 펼쳐지는 삶이 있다.


불교에서 '고정된 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칫 오해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운 말인데, 매 순간의 진동수에 따라 나가 다르다고 이해하면, 불교의 주장들이 모순 없이 이해되긴 합니다.


그리고 나의 진동수는 최대한 내 안으로 에너지를 몰입할 때 올라가고, 화를 내거나, 탓으로 돌릴 때 내려갑니다.


이론적으로는 절대성 수준으로 고도로 높인 에너지를 24시간 내내 매 순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펼쳐진 나의 삶이 깨달은 삶입니다.


다만 절대성 수준으로 에너지를 높이는 것이 쉽지 않고, 한번 몰입했다고 해서 순간 그 정도 집중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거죠.


진동수는 자신의 삶의 문제를 오롯이 책임지고 넘어설 때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상과 관련 없어도 몰입을 잘하는 사람들의 진동수가 높기도 하죠.


진동수란 개념은 특정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에너지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집단 무의식처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일본 최고의 부자이자 직관이 고도로 발달한 사이토 히토리 님도 책에서 진동수, 파동의 비유를 자주 듭니다.

학자들이나, 명상 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더 정교한 설명을 덧붙이기는 하는데,

정화를 꾸준히 하다 보면 비슷한 아이디어는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셋째. 온전한 통합을 이루는 길에 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동수의 수준에서 '공' 단계가 있습니다.

(진동수 단계로 '공'에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인지적으로 여러 해석을 하려 애쓰는데,

특정한 수준 이상으로 깊게 몰입할 수 있는걸 말합니다.


만약 명상을 통해 '공' 단계에서 24시간 그 단계에 머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깨달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급 수련 과정에서는 하루 중, 가급적 오래 공 단계 이상의 수준에서 머무는 것을 지향하며 수련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절대성의 단계가 있습니다. 온전한 통합, 깨달음에 이르려면 공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 단계에 오래 머물 수 있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진동수에 알맞은 삶이 펼쳐지며, 그에 맞는 여러 능력들을 갖추게 됩니다.)


이 단계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지만, 명상을 수련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어떤 순간에 일시적으로 깊이 몰입하면서 단계 혹은 그보다 약간 낮은 단계(하지만 꽤 깊은 단계)에 들어가는 경험들을 하기도 합니다.


가수가 노래를 하는데 순간적으로 듣는 사람까지 마음으로 전해지는 에너지를 느끼는 순간,

예술가가 작업을 하는데, 그 에너지를 공명하게 되는 순간,

학자들이 몰입해서 고도의 작업을 하는 순간.

일시적으로 그런 공 단계 언저리의 진동수에 닿기도 합니다.


다만, 그 단계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의식적으로 다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기에 보통은 찰나의 순간에 끝나곤 합니다.

(내가 의식하는 순간, 생각이 개입하면서 높은 진동수로 올라가지 못하니까요.

의식을 하면서도 생각의 개입을 없애는 훈련이 명상입니다.)


또는 생각의 개입 없이 몰입을 하다 보니 높은 진동수에 도달했는데,

의식적으로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서 위험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재 학자, 예술가, 작가들 중에 작업에 몰두하다 정신적 문제를 겪고 말년이 좋지 않았던 경우가 종종 있었지요.


이런 문제점들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들어가는 몰입이 갖는 한계가 있습니다.

온전한 통합을 위해서 꼭 넘어서야 하는 지점까지는 오르지 못하는데요,

그 지점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무의식 정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산이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을 테니까요.


내 인생을 괴롭게 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가끔 상대나 상황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며

가슴이 찡하게 연민의 감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정화를 한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해결하기에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정화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정화 명상을 하는 것이 내면 에너지를 통합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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