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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스티아 Feb 23. 2024

새로운 틀에서 생각하라는 조언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Feat. 아이디어 메이커 Thinking in New Boxes

책을 읽는 인구는 줄고, 출판사는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점점 출판 시장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즐겁습니다.

사소한 예로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관심 갖던 주제에 관해 국내에 나온 책이 거의 없어서 그 분야를 더 깊이 파지 못했는데, 2019년 전후로 그 분야의 중요한 책들이 몇 권 나와서 흥미롭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창의성 분야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창의성 분야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던 10여 년 전에는 창의성에 관한 책들 중에 공허한 책들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창의 교육이 필요하니까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 주장만 가득한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 같은 천재들의 작업을 분석해서, 창의성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리한 책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몇몇 천재들의 작업물을 두고 창의성을 갖추려면 이렇게 하라는 당위적 책들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천재의 발상이 태어나는 순간까지 작용한 힘과 경험, 사유 방식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결과물만 분석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 작업물을 만든 천재한테 그 책의 분석대로 '이런 이런 규칙에 의거해서 아이디어를 발상해 보세요'라고 말해도 아마 동일한 작업물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 메이커'라는 책은 보스턴 컨설팅 그룹 컨설턴트 출신 저자들이 쓴 책입니다. 이 책에서 관심을 갖는 창의성은 비즈니스 전략적 창의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디어 발상 과정에 관심을 갖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은 2014년 출판본이네요. 이 책을 읽던 당시 '새로운 틀에서 생각하라'란 점에서 꽤나 공감 가는 통찰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제 경험이 많이 섞인 채로 이 책을 언급하다 보니, 오늘 글의 내용이 책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창의성에 대해 당위적으로 주장하는 책들은 '창의성을 기르려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틀에서 생각해 보세요.'라고 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오해가 있기 전에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사고하는 경우는, 새로운 틀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빨간 사과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빨간 사과가 아닌 것'을 그대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머릿속에 초록 바나나, 기차, 흰 구름. 뭐든 떠 올랐다면 이미 내게 빨간 사과가 아닌 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무엇이 아님'을 떠올릴 수는 없습니다.


'아이디어 메이커'에서는 간단한 퀴즈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보여줍니다.

정사각형을 동일한 네 조각으로 나누는 퀴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떠올리는 틀은 수직과 수평의 선입니다.

이를 인식하고 나면 수직과 수평의 틀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수직, 수평이 아닌 게 뭘까 싶은데, 이미 우리는 대각선이란 선택지를 알고 있습니다.


대각선까지 사용하고 난 후, 지금까지의 틀이 직선인 것을 떠올릴 수 있다면 직선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책의 퀴즈에서는 몇 개의 선을 구부려서 동일한 면적을 만들었던데요, 저는 정답을 보기 전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선입니다. 제게는 없는 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수학 퍼즐 등을 즐겨하는 분들이라면 이런 틀들이 여러 개 있을 것이고, 그중 하나를 꺼내어 적용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또 우리가 갖고 있는 틀을 메타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구부리든, 한 번에 긋든 다 곧게 그은 선이었는데, 그것이 아닌 틀을 찾아보죠. 이건 우리가 알고 있는 틀 중에 있습니다. 바로 곡선입니다. 곡선으로도 동일한 면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새로운 틀'에 대한 통찰을 얻은 후 의식적, 메타적으로 틀을 인식하곤 합니다.


그러다 '나를 소개하는 것'에 대한 창의성을 생각할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카이스트 배상민 교수님은 미술 입시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파슨스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입시 과제는 자화상이었는데, 미술 입시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채로 어떻게 하면 쟁쟁한 경쟁자들과의 경쟁에서 선택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일차적 자화상의 틀은 2D 회화입니다. 그것도 사실적 묘사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습니다.

조금 더 틀을 넘어서면, 꼭 사실적 묘사일 필요는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명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고흐의 자화상이나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익숙한 그림들이 떠오를 겁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으면 되겠네요. 하지만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짧은 시간에 자화상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기존의 2D 회화의 틀을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2D 회화가 아닌 자화상이 뭐가 있을까요? 미술의 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3D 조각으로 틀을 넓힐 수는 있습니다.


결국 배상민 교수님이 파슨스에 합격할 수 있었던 자화상은 '엑스레이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앉아서 '새로운 틀에서 생각해야지' 하고 떠올린 결과물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자화상 과제를 준비하던 당시 뼈가 부러져서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을 일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새로운 틀이 하나 생긴 것이죠. 물론 똑같은 경험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자화상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미 이 분이 어릴 때부터 미학적 인간으로 온 감각을 열고 사유해 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틀을 넘어서는 걸 인식하며 살다 보니, 저를 소개해야 할 때도 적용해 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원 수업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가져오라는 적이 있습니다.

예술학 대학원 수업이다 보니, 예전에 그려놓았던 그림이나, 에세이 등을 써서 발표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때 종이컵을 활용하여 연꽃을 만들고, 그 안에 부엉이를 색종이로 접어 넣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2D 회화에 약하니, 그 틀을 벗어나서 저를 표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예술이 창의성에 도움이 되나?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명화 작품 등을 넘어서는 틀을 많이 갖추려고 했거든요. 시각예술이 아닌 음악, 무용, 연극, 영화로 넓히는 것은 물론이고, 문학에서 한시까지 예술의 틀을 넓혀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틀 안에는 오리가미, 3D 입체 공예들도 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한참 내면의 창의적 연금술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저를 표현하기 위해 간단하게 연꽃 속에 들어있는 부엉이를 선택해서 넣어봤습니다. 작업의 오리지널함보다는, 제가 표현하고픈 대로 자유롭게 틀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수업에서, 기존에 나를 표현해 봤던 틀이 전혀 없던 분은 새롭게 나를 표현하라는 요구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분이 다른 분들의 발표를 유심히 보면서, 그중 자신에게 맞는 틀 하나를 선택해서 무사히 발표를 마치시더군요. 결국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틀에 대해 '새롭게, 창의적으로 생각하세요'란 요구는 공허할 뿐입니다. 평소에 의식적으로 기존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많이 갖추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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