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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스티아 Feb 27. 2024

브랜드 컨설턴트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의 창의성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두 가지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첫째. 브랜딩 수임 비용이 생각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

둘째. 입사하기 전 막연하게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할 거라는 예상과 실제 업무가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


이 둘은 사실 같은 이유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 용역을 맡기는 프로젝트의 경우 상표와 디자인에 대한 법적 권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아파트 브랜드를 예로 들어보면, 앞으로 진행될 프로젝트마다 이 브랜드를 써야 하는데, 누군가가 상표권을 주장해서 사업 진행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잖아요. 큰 프로젝트의 상표권을 선점한 경우, 합의 금액을 터무니없이 부르기도 해서 합의를 포기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브랜드를 개발하고, 론칭하고, 운영하는 과정에 비용이 매우 많이 듭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법률적으로 나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상표와 디자인을 의뢰하는 것이죠. (법률적 권리를 확보하지 못해 사용될 비용을 생각하면 브랜딩 수임료가 오히려 싸게 느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자연어 혹은 자연어의 조합은 사실상 모두 상표 등록이 되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상표권을 등록할 때는 유사 상표라는 것도 고려하게 되는데요, 동일한 상표가 없더라도 유사 상표로 간주되어 상표등록이 어려운 경우가 굉장히 흔합니다.


그래서 브랜드 컨설턴트가 하는 일은 상표와 디자인의 법적 권리 확보가 가능하면서, 해당 회사와 프로젝트에 적합한 브랜드 전략을 짜서 가장 적합한 후보 안 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지난한 일은, 정말 마음에 들고, 이 프로젝트에 딱 맞을 것 같은 크리에이티브한 후보 안들이 상표 등록이 희박하여 다 죽어버리기에 끊임없이 계속 네이밍 발상을 해서 상표 검색을 하는 일입니다. 정말 네이밍 발상 기계가 된 것 같고, 또 눈알이 빠져라 특허청의 상표 검색을 통해, 유사 상표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래도 불안하면 전문 변리사님께 자문을 구하며 계속 네이밍 발상을 하는 일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일입니다. 클라이언트는 잘 구축된 경쟁사의 브랜드 같은 브랜드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프로젝트 결과 발표를 처음 받아볼 때는 두 가지 이유에서 보통 실망을 하게 됩니다. 저희도 처음 생각한 멋진 안 들은 상표권을 획득하지 못해, 법률적 권리 확보가 가능한 안들을 보여주다 보니, 예상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브랜드 이미지는 브랜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략과 마케팅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낯선 브랜드를 날 것으로만 봤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거나 실망스러운 경우가 마련입니다. 최근 들어 철근 누락으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많이 받긴 했지만, 예전에는 고급스러운 아파트 브랜드에서 늘 상위권에 있던 '자이' 브랜드도 브랜딩만으로 그런 이미지를 만든 건 아닙니다. 브랜드를 론칭할 때,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우아한 고급스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이영애 씨를 모델로 기용하고, 꾸준히 마케팅 활동을 해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브랜드 이미지 구축과 관리가 따라야 하기에, 처음 브랜드를 결정하는 순간의 결정권자들 (보통은 회사의 주요 임원급, 대표 등)의 선택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브랜드 전략적 차원에서 최선의 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브랜딩 일을 할 때, 경쟁 PT를 통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일, 끊임없는 브랜드 네이밍 발상, 전략 기획, PT 준비 등 여러 단계의 일들을 하긴 하지만, 어쨌든 최종 결정을 통해 브랜드가 결정되어야 업무가 마무리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은 설득, 커뮤니케이션 일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회사에서 연차가 쌓여 노련한 윗분들을 보면서 감탄했던 지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제가 브랜딩 회사에 소속되어 대기업 프로젝트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즘 인공지능이 창의적 영역을 대신한다는 소식을 보며, 여전히 진짜 창의성을 발휘할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인공지능이 1분도 안 걸려서 브랜드 네이밍을 해준다는 서비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느낌을 넣으면, 그와 비슷한 동의어들을 무작위로 조합해 주는 방식이더군요. 이 정도 수준의 조합은 제가 일을 시작하던 당시에도 가능했습니다. 그때는 브랜드/네이밍 제너레이터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습니다. 다만 차이점은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에 부담하는 비용이 꽤 비쌌고, 지금은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해졌다는 겁니다.


브랜드 네이밍 발상 기계가 된 것 같이 무작위 조합을 하고 있을 때면, 그 서비스를 이용하고픈 유혹이 컸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서비스 이용을 고려했지만, 결국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저희가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를 해결할 창의적 능력이 없었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아파트 브랜딩을 해줘'.

그 당시 브랜드 제너레이터나 요즘의 인공지능 브랜딩이나 접근 방식은 비슷해 보입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단어 - 로열, 임페리얼, 엘레강스,.... 

아파트, 주거, 공간을 표현하는 단어- 하우스, 팰리스, 파크,....


이렇게 직접적인 방향의 유사어들을 보여줍니다. 물론 유사어의 범위가 넓어지고, 사람이 생각해 내는 것보다 좀 더 빠르게 비슷한 단어를 많이 제시해 주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법률적 권리가 확보되며, 경쟁사들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전략을 가질 수 있는 브랜드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나라 아파트 브랜딩은 '래미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래미안 이전에는 앞서 언급한 직접적 단어의 조합, 즉 현재 인공지능 브랜딩의 접근 방식의 브랜딩이 다수였습니다.


그런데 래미안은 음성학적으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나타내는 새로운 한자 조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하게 된 것이죠. 래미안 이후에는 직접적인 동의어의 조합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의 단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조어를 만드는 브랜드가 많이 생겼습니다. 래미안 브랜딩을 보며 생각의 방향을 트는 힌트를 얻고,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는 있어도, 누군가 처음에 생각의 방향을 틀 것은 생각해내야 합니다. 

(예술의 세계도 이와 유사한데, 그건 다음에 기회 되면 더 언급해 볼게요.)


지금은 인공지능 브랜딩이 직접적 단어의 조합에 그치고 있습니다. 상표권이 중요하지 않은 경우라면, 그 정도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물에 불만족하는 사람들이, 점점 다른 방향의 결과물을 요구하는 프롬프트를 입력한다면, 또 시중에 있는 다양한 사례들의 유사성을 분석해서 그와 비슷한 결과물을 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방향의 프롬프트를 떠올려 내는 것, 그리고 기존 사례들을 보며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힌트를 얻어 전혀 다른 영역의 것들을 조합해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는 발상력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브랜딩 회사에 있을 때, 경력이 오래된 분들이 '이미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상표 등록이 다 되어서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언제나 돌파구를 찾아오셨던 것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너무나 머리를 쥐어짜고 힘든 과정이어서, 저희는 휴식시간이나 워크숍 등에서 게임을 할 때 머리 쓰는 게임은 절대 하지 않고, 정말 한 방에 끝날 수 있는 단순한 게임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 ) 그 돌파구는 '이러이러한 브랜딩을 해줘'라는 프롬프트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대신 인공지능이 반가운 부분도 있습니다. 브랜드 네이밍 발상 기계가 된 것 같이 단순 조합이라는 기계적 작업이 필요할 때, 예전의 브랜드 네이밍 제너레이터처럼 비싼 금액이 아니더라도, 저렴한 비용에 나의 도우미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기계적 조합의 경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면서 빨리 해결하고, 여기서 출발해서 색다른 아이디어로 건너갈 수 있는 거죠. (색다른 아이디어로 건너가는 것은, 기존에 그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해왔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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