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갈등 상황의 소통 방식, 불안과 분노 다스리기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불안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검사입니다. 여기서 불필요한 오해를 삼가기 위해 미리 언급하자면, '사람'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근본 불안'의 종류를 9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여러 심리 검사지들이 있지만, 제가 에니어그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근본 불안은 보통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서 작용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는 많은 행동을 일부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니어그램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창작 도구로의 관심 정도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작가들이 캐릭터를 정할 때, 에니어그램을 활용하여 캐릭터를 다양하게 배치하고, 그 캐릭터가 했을 법한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한다고 하더라고요.
이왕 배울 것, 제대로 배우자고 생각해서 KEEC 한국에니어그램교육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일반강사 과정을 들었습니다.
한국에니어그램교육연구소에서 강사 교육을 이수하면, 에니어그램 테스트지를 구입할 자격이 생깁니다. 에니어그램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보입니다. 이곳 테스트지로 에니어그램 테스트를 하면, 사람들의 근본 불안은 근원적인 것이기에 한 번 나온 결과 유형이 보통은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온라인 무료 에니어그램 테스트를 해봤더니, 기본 유형 검사에만 81문항을 활용하는 한국형에니어그램 테스트와 결과가 많이 다르더라고요. 더 문제는 온라인 무료 테스트는 할 때마다 제 유형이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강사 자격을 이수한 곳의 질문지가 절대적이냐, 이건 잘 모르겠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많은 분들이 애써온 협회인 만큼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결과를 만드는 곳이라 생각은 합니다.
어떤 협회의 테스트지를 이용하든, 테스트할 때마다 유형이 달라지는 테스트지는 에니어그램 취지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라인 무료 에니어그램 테스트는 참고 삼아 보시되, 결과를 활용하실 때는 신중해지시길 권합니다. (자신에 대한 잘못된 프레임을 하나 씌울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인생의 문제에 대해 무의식의 많은 단계를 다루고자 공부하고 여러 가지 수련을 하고 있다 보니, 에니어그램 하나만으로 답답한 삶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에니어그램을 저는 명상과 일상에서 생각보다 더 잘 활용하게 되어서 그 부분을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편협한 에고 수준에서 훨씬 더 큰 잠재력을 가진 참나로 통합하는 게 생명의 본능입니다.
명상과 무의식 정화는 나의 한계, 안전지대 comfort zone을 넘어서는 단계를 덜 괴롭고 더 효율적으로 도와주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나의 세계의 끝에서 다른 세계와 맞부딪히면, 화가 나거나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보통 '나는 올바르게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나 상황이 나를 괴롭힐 때'입니다.
만약 진짜 상대방이나 상황에 도덕적, 법적 문제가 있는 경우라면,
그림자 통합을 위한 정화를 꾸준히 한 후 올라오는 밝은 지혜로 대처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저 가치관의 차이에서 기대치가 채워지지 않아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 내가 붙들고 있는 신념이 왜곡되어 있는 게 아닐까 보다 넓은 시야에서 메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도구가 에니어그램입니다.
에니어그램은 특정한 갈등 상황에서 소통 방식에 본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대부분 공격적인 갈등 상황은 사실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행동에서 나오거든요. (공격 중에 회피형, 수동적 공격도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잘 진행해야 하는 갈등 상황의 프로젝트라든지, 아니면 보다 깊은 소통을 통해 상대로부터 최적의 피드백을 끌어낼 때 저는 에니어그램을 활용합니다. 굳이 자격증 과정까지 이수하다 보니, 언제든 진단지로 테스트를 해줄 수 있어 편리하긴 합니다.
에니어그램은 특히 가족 등 특수관계인의 갈등에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는 사회화를 거치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에니어그램 유형별 고착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특정한 갈등 상황에서, 근원적 불안을 건드려 여유가 없어질 때 고착 유형이 나타날 수는 있겠네요.
그런데 가족처럼 친밀한 사이에서는 바깥세상에서의 가면을 내려놓고, 가장 왜곡되고 고착된 안경을 끼고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그 사람에게 자기의 잣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내 기대치가 채워지지 않으면 힘들어합니다.
가족 간 관계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에니어그램의 불안을 다음처럼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나는 목구멍이 작아서 삼키기 어려운 알약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의 힘듦을 알아주지 않고 자기들 잣대로 알약을 빨리 삼키라고 강요하는 상황입니다.
사람마다 알약의 종류는 유형별로 다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 근원적 불안에 닿아있는 경우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내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를 내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고요.
명상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 고착과 집착을 내려놓고, 유연하게 더 큰 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믿는 것이라도, 그것에 고착되어 있으면 더 큰 나로 통합되지 못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바람직하다고 믿어지는 가치관은 그것에 고착되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나를 메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툴로 에니어그램을 활용합니다.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 경우, 나의 에니어그램 유형에 비추어 혹시 내가 왜곡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상대방 행동의 근거가 근원적 불안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나의 분노와 불안을 다스리기가 수월합니다. 다만, 이렇게 알아차리는 정도로는 불안과 분노를 통합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는 단전을 챙기는 등, 메타적으로 인식한 채 에너지를 집중하여 에너지 레벨을 높이는 게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