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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스티아 Feb 22. 2024

명상 중 삼매, 무아지경에 대한 오해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늘게 됩니다.

명상도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경험을 기준점으로 삼고 지향하다 보면 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전에 해외여행이 그리 활발하지 않을 때는, 누군가 어떤 세상을 다녀오면 그 사람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지역을 다녀온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아, 그 사람이 다녀왔을 때의 이 동네는 그랬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이 동네는 이렇구나.' 하고 자신만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물리적 여행도 그럴진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명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훨씬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고, 사람들마다 다녀온 지역도 다르니까요. 


결정적으로는 다녀온 사람들이 자기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려면 온전한 통합에 이르러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얼마나 멀리 다녀왔든, 얼마나 신비한 경험을 했든 다 불완전한 정보입니다. 그럴 때는 믿을만한 선지식, 온전한 통합에 이른 스승들의 길잡이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길잡이의 도움을 받아도 결국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이 되겠지만요.





명상을 계속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반드시 꼭 그러할 필요가 없는 경험'들이 마치 꼭 지향해야 할 모습인 듯 퍼져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내면 에너지를 통합하고 수련의 진척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통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중 대표적인 오해가 무아지경과 삼매입니다.

무아지경과 삼매에 빠진 명상 고수는 눈을 감고 자신만 알고 있는 깊은 세계에 들어가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나도 없고 시간도 멈춰있는 무한의 세계라고 나중에 이야기합니다.


무아지경과 삼매는 고도로 통합된 특정한 에너지 레벨입니다.


어느 날 제가 명상을 하다, 유난히 고요한 상태에 들었을 때 제 스승님께 "조금 전에 무아지경에 든 것 같은데요."라고 했더니, "그게 왜 무아지경이냐?" 하시더군요. 그 순간 저의 고요한 통합의 정도는 이미 무아지경 레벨을 넘어서서 더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 레벨을 일컫는 명칭은 또 다른 게 있습니다. 즉, 삼매나 무아지경 같은 표현은 고요한 기분이 아니라 특정한 에너지 레벨을 일컫습니다.


또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무아지경이나 삼매에 들었다는 체험을 할 때 보통 눈을 감고 내면세계에 빠져있어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무아지경이나 삼매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깊은 에너지 레벨에 도달할 때도 원래는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내면에 너무 치우쳐 있으면 이 또한 온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온전한 통합을 이룬 분들을 오히려 일상이 신비주의로 인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내면세계에 빠져있거나, 제3의 눈 같은 불완전한 개념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일상의 우리 육체에 두 눈이 있으면, 그 눈을 활용해서 내면세계의 작용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명상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육체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외치면서,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을 동시에 쓸 수 있다는 것을 진짜 알고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 다들 명상을 할 때는 눈을 감고 내면세계에 빠져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만약, 명상의 목적이 온전한 통합까지 목표로 하지는 않고, 지금 내게 편안한 정도를 지향한다면 어떤 방식을 써도 괜찮습니다. 다만 온전한 통합을 지향하지만 아직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해서 눈을 감고 내면에 몰입하는 모습을 추구했다면, 이 글이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산을 곧장 정상까지 오르고 난 후 위에서 내려다볼 것인가, 조금씩 오르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옆길로 새어 숲을 구경하고 있느냐의 차이로 이해하면 됩니다.




제가 지금 스승님 밑에서 수련을 시작하게 될 때, 스승님께서 몇 번 강조하신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통합을 이룰 때까지, 기술(신비술)에 대해서는 내려놓아라.

신비술을 아무리 쫓아도 결국 그 길로는 하나가 부족해서 온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

어차피 온전한 통합을 이루고 나면, 그 이후에는 마음대로 원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방향을 지도받아서, 저는 온전한 통합을 이룰 때까지 가급적 옆길로 새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다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요, 이런 방향을 지향하다 보니 주로 명상의 진척도 깊이로 점프하는 식으로 일어납니다.


신비체험을 하는 경우는 숲을 둘러보고 있는 경우라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이런 내면의 체험도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 내면이 이끌어줘야 가능한 겁니다. 다만, 주변에서 본 명상의 고수가 경험한 신비체험을 명상의 진척이라 오해하고 그런 방향을 지향하면, 우리의 내면 역시 숲길로 안내할 확률이 높습니다. 


숲길을 둘러보고 가든, 정상으로 바로 가든, 그건 여러분 마음입니다.

다만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는 알고 스스로 선택하며 수련을 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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