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스티아 Feb 14. 2024

예술가와 명상 수련자가 만나는 지점

(feat.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예술가 중에, 고도의 몰입력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의식적으로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명상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은 물론 관객도 현재에 있게 하는 치유사이자 구도자입니다.


뉴욕 모마에서 진행된 736시간의 퍼포먼스, 예술가가 여기 있다 Artist is Present.


이 퍼포먼스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예술가의 작업만 텍스트로만 접했을 때는 알기 어려운 경험입니다.


퍼포먼스든 단순합니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전시장에 탁자 하나만 놓고 앉아있습니다.

그녀의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싶은 관객은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립니다.

자신의 순서가 되면, 오직 한 명의 관객이 원하는 만큼 마주 앉아 있을 뿐입니다. 

시간제한이 없다 보니, 자신이 원하는 만큼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긴 줄을 서고도  그날 안에 자신의 차례까지 닿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줄 뒤에 있는 관객은 아마 그날 퍼포먼스에 참여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그녀와 관객이 마주 보고 앉아있는 모습을 360도로 둘러싸고 지켜보는 관객도 많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앞에 있는 관객이든, 

360도 둘레에 있는 관객들이든 모두 침묵 속에서 하나 되어 소통한다는 겁니다.

그들 중 일부는 벅찬 감동을 느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요.


이 이야기는 안희경 님의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책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명상 수련의 차원에서 보면,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내면 에너지 통합'이라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통합이 깊이 이루어지면 어떤 레벨 이상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에너지 차원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명상에서는 그 단계를 '한마음이 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공감을 하는 차원에서도 순간의 몰입력이 깊다면 그 단계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공감보다는 깊은 차원의 몰입이 필요합니다.


명상 수련을 깊이 해서, 이 정도의 진척을 이뤄낸 사람들은,

의도를 가지고 몰입하면 바로 상대와 '한마음 상태'는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때는 상대의 불안도 고요하게 가라앉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안과 혼란, 어두움 속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보이지 않고 막막한 경우에도, 명상 수련으로 한마음 상태를 유지할 있는 사람이 순간에 몰입을 함께 유지해 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고요해지며,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능력은 몰입력, 내면에너지 통합 능력과 관련이 있는데,

명상 수련을 오래 했다고 해서 누구나 같은 단계에 도달하는 건 아닙니다.

올바른 방향으로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굳이 명상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고도의 집중과 몰입을 하는 사람들 중에 이 능력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난히 몰입력이 뛰어난 예술가라든지, 천재적 몰입력의 학자 같은 경우처럼 말이죠. 가수들의 공연 중에, 그날따라 유난히 가슴으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우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정도 깊이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도 '한마음'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에너지의 전달이 가능했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마리아 아브라모비치는 예술의 형태로 내면 에너지 통합 수련을 합니다.

추운 겨울 얼음물에 들어가서 움직이지 않거나, 다른 신체적 고통을 가하면서 그 속에서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방식을 훈련하다 보니, '한마음' 단계까지 내면에너지 통합을 이뤄낸 것이죠.


요가 수련이 지향하는 원리도 비슷합니다.

어려운 신체적 동작에 집중하면서, 고도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것이죠.

명상과 마찬가지로 요가 수련도 오래 하거나 어려운 동작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몰입과 통합의 단계를 다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순간 생각을 내려놓고 그 사람이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의 정신력과 관계된 것이니까요.


결과적으로 어떤 방식을 쓰든, 고도로 몰입하여 더 높은 차원의 내면 에너지 통합을 이뤄내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신체적 고통이 있으면 오히려 집중력이 더 흐트러져서, 명상의 방식으로 집중 수련을 할 뿐입니다.

수련이 진척되면 굳이 몸의 고통을 주지 않고,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상하지 않고도 가능하거든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노파심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으면 되는데,

'한마음'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신비하고 아름답고 장엄한 효과가 꼭 고통스럽고 혹독한 수련으로만 가능할 거라는 선입견과 오해가 생길까 봐 말이죠.


저는 여전히 예술가로서 세상과 연결되고 세상의 고통을 담아내려는 아티스트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작업에는 경외심을 표하고, 예술의 의의에 대해 많은 자극을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제 방식의 수련을 계속하려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면 그림자 에너지 통합에 힘이 된 사이토 히토리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