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예술과 같은 창의적 영역은 어느 분야보다 재능이 중요해 보입니다.
자신이 예술 분야에 큰 관심을 갖고, 그 분야의 신인 작가들을 관심 있게 살펴보며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이미 완성형인 유명한 예술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유명해진 예술가의 시작과 작업 과정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러한 창의적 작업은 엄두도 못 낼 것 같은 생각에 먼저 주눅이 들게 됩니다.
예술에서 재능이 중요한 이유는, 답이 없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것을 찾아갈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답이 있는 기존 지식의 영역은, 지식을 익히면 됩니다. (물론 지식을 익히는 공부는 대부분 재미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을 참고 꾸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재능이겠네요. 요즘은 공부도 재능이라고 인정하는 추세기도 합니다.)
학교 다닐 때,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고 감성이 풍부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미술학원 문턱에도 못 갔지만, 다른 사람이 그림 그리는 방식을 한 번 보면 쓱쓱 그려내고,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글도 잘 써서 입시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도 문창과에 합격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작업물이라, 사실 작품의 수준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진짜 재능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노력까지 더해서 멀리 나간 경우를 민희진 님의 사례를 보며 한 번 더 확인해 봅니다. 당대 대중문화에서 가장 세련된 이미지를 한 발 앞서 주도해 가는 민희진 님의 감각은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못 따라갈 것 같습니다. 이때의 재능도 원래 갖고 있는 감각에, 자신이 무엇을 하면 될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천재적 재능을 원래 타고난 경우가 아니라, 소소히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일 때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습니다. 오스틴 클레온의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입니다.
이 분은 10여 년간 스스로 예술 작업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지금은 자신의 방식 하나를 찾아내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 기사의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가리거나 남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게 이 분의 작업 방식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의 예술적 관심으로 창작 작업을 할 때 해봄직한 다양한 상황에 대해, 경험에서 우러난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책입니다.
읽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 책의 두 가지 내용이 여전히 제게 남아있습니다. 창의적 작업을 해야 할 때면, 마음 한 구석에서 힘이 되어주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첫째.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한 명의 작업을 훔치면 도둑질이라 하지만, 천 명의 작업을 훔치면 천재라 한다.
이런 내용의 문장이 있었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든지,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기존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는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왔습니다. 너무 흔하게 들어와서 그런지, 막상 내가 창의적 작업을 해야 하는 막막한 과제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문장들인 것 같습니다.
저는 창의적 작업의 오리지널, 고유함과 독창성은 얼마나 의외의 것들을 많이 조합할 수 있느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언급한 책 '오리지널스 (by 애덤 그랜트)'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분야에서만 깊게 연륜을 쌓은 전문가의 맹점과 폐해와 비교하며 다양한 문화권, 경험을 한 사람들이 창의적 결과물을 더 많이 낸다고 했습니다.
오리지널스 책에서 그는 세 가지 반전이라며, 창의성을 높이는 경험의 조건을 언급합니다.
첫째, 해외 거주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해외 근무 시간이 중요하다.
둘째, 자신의 원래 문화와 다를수록 좋다.
셋째, 심층적 경험, 즉 해외근무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중요하다.
저는 저자가 이런 결론을 낸 이유는 설문조사의 항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해외근무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익숙한 것들로부터 관련성이 낮은 것들을 넓게 많이 접하되, 인풋 체질이 아닌 아웃풋 체질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답을 만들어가려는 태도)을 갖고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을 조합하면, '천 명의 작업을 훔쳤지만, 천재' 소리를 듣게 됩니다. 천 명의 작업을 하나의 작업에 훔쳐오려면,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소화하게 되니까요.
재능을 고민할 시간에, 다양한 분야의 인풋을 하나라도 더 많이 챙겨 오는 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많이 보는 것보다는, 아웃풋 체질로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살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둘째. 창작자들도 대부분 겪는 좌절의 시기를 버텨내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미국 작가님이 있습니다. 미국 청소년 소설의 대가 E.L. 코닉스버그 작가님이 창작에 관한 조언을 요청받았을 때, 딱 한 마디 하시더군요.
끝까지 써라.
얼핏 듣기에 허무해 보이는데, 저는 비슷한 조언을 국내 소설가와 드라마 작가님의 인터뷰에서도 봤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이 분야의 대가였던 것만 기억납니다.)
귀한 조언의 순간에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끝까지 써라' 혹은 '끝까지 완성하라'일 정도로, 창작자들이 중간에 좌절을 하고 포기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에서 이 이야기를 아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표가 나옵니다.
저작권 상의 이유로, 책의 이미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글에서는 그 책을 바탕으로 제가 재해석한 표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래 표는 창작자들이 창작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성취에 대한 일반인들의 예상을 표로 나타낸 것입니다.
처음 아이디어 발상에서 고민을 하다가, 이거다! 싶은 게 떠오르면 그때 확 작업에 속도가 붙으며 진전이 있다가, 중간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지만 해결해서 결국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아래 표는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의 저자가 그 실체를 표현한 걸 응용했습니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끙끙대다가,
갑자기 어떤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르면 아주 신이 납니다.
한참 아이디어가 잘 굴러갈 때는 "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난 천재가 분명해!!" 하고 낄낄거리게 됩니다. 이대로 완성하면 희대의 역작이 탄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아이디어를 작업물로 구현해 내는 과정에서, 끝도 없이 땅굴을 파고 내려가게 됩니다.
"아...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형편없어... 이런 건 빨리 때려치워버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작품에 대해 자신감도 없고, 자존감도 떨어져 가며 작업을 포기하고픈 유혹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습니다. 여기서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앞서 대가들의 조언이 '끝까지 써라/하라'였던 거죠.
그 조언을 붙들고, 꾸역꾸역 완성을 하면, 원래 의도와 달리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보잘것없는 완성품이 하나 눈앞에 있게 됩니다. 그래도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과 비교하면 아주 조금 이전보다 실력이 향상되어 있긴 합니다.
이 과정을 부단히 반복하면서, 남들이 보기에 재능이라 불릴 만한 실력이 쌓여갑니다.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훌륭한 창작자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서, 놀랍게도 다들 비슷하게 이 과정을 겪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저는 그런 경우라면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카이스트 배상민 교수님의 저서 '나는 3D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계기가 생겼습니다.
이 분의 제자 중에 다른 학생들보다 디자인 감각이 떨어지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성실함과 열정으로 파슨스에 입학은 했으나, 재능 있는 다른 친구들 속에서 버티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성실과 열정만큼은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앞섰을 것 같습니다. 우린 이런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결말이 있습니다. '재능은 부족해도, 열정과 성실함으로 결국 해냈습니다!' 현실은 씁쓸하게도, 그 제자는 디자인 업계 취업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0년 간 디자인 회사에 입사조차 못한 채 아르바이르 생활을 합니다.
여기, 이제 우리가 기대하는 결말이 나옵니다. 10년 후, 가장 트렌드 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MTV 디렉터가 된 것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디자인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던 거죠.
저는 그의 사례를 보면서, 예술 분야의 진짜 재능은 '될 때까지 꾸준히 할 수 있는 열정'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담당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제가 재능이 있을까요?"
제가 본 많은 예술가 선생님들은 이런 질문을 난감해합니다. 특별히 재능이 있어 보이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기도 하고요. (시작 지점에서 재능이 있어 보여도, 예술 분야 전체로보면 멀리 가지 못 가고 주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술 분야의 재능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 배울 수 있는 능력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해내겠다는 끈기와 열정이라 생각합니다. 이게 있다면, 당신은 재능이 있는 겁니다.